수여선 점과 점, 선과 선을 이어 새로운 공간을 빚다

Blog Single

수여선이 생기기전 각 지역들은 하나의 점처럼 서로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수여선이 생기면서 ‘선’이 생기고, 선과 선이 만나 새로운 공간이 빚어졌다.

수여선(水驪線)의 첫 이름은 경동(京東)철도였다. 말 그대로 경기도 동남부 지 방을 동서로 횡단하였다. 1930년 12월 1일 수원-이천 구간을 먼저 개통하였다. 이듬해 12월에는 수원-여주 73.4km 전 구간을 개통하였다. 수여선은 증기와 가솔린을 연료로 쓰는 협궤열차1였다. 개통 당시에는 하루 9편(수원발 5편, 여주발 4편), 1938년부터는 각각 4편씩 운 행되었다. 열차가 지나가는 행정구역은 경기도 수원시, 용인군(현 용인시), 이천군(현 이천시), 여주군(현 여주시)이다. 수원에서 여주까지는 4시간 40분이 걸렸다.

일제시대, 식민지 경제수탈 목적으로 건립된 수여선

역사적으로 화물 교통 수단은 남한강 수운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남한강 유역과 경북 지역에서 조정에 상납하는 전세품들이 남한강의 조운을 이용하여 한양까 지 올라갔다. 일제 강점기에 버스가 생기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주 화물 운반 경 로는 남한강 수운이었다. 그러나 강은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상황이 달라졌 다. 따라서 얼마만큼의 양을 얼마만큼의 시간을 들여 운반할 수 있는지에 대한 변수가 많았다. 게다가 겨울에는 강이 얼어 화물 운반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등장한 수여선은 사실상 그 목표가 뚜렷했다. 지역의 풍부한 농, 임산자원을 운반하는 것이었다. 1939년 일본에는 대흉작이 들었다. 그런 가운데 태평양 전쟁 물자 조달 확보를 위해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조선 각지의 양 곡과 가축 물품의 강탈을 자행했다. 당시 일제의 강탈은 잔혹했다. 많은 사람들 이 먹을 것이 없어 피폐해지고, 일부는 거지가 되어 떠돌기도 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일제는 배급소를 통해 옥수수, 수수, 엿 등을 나눠줬다. 한 번은 동남아시아 쌀인 안남미(알랑미)를 배급 받았는데 온통 석유냄새가 나서 수차례 물로 씻어도 소용없었지만 배가 고파 억지로 먹었다고 한다.2 수여선은 일제가 물품을 강탈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당시 수여선과 수인선을 직접 운영했던 기관사 최수현씨 역시 수여선의 기능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수여선, 수인선은 하루에 (왕복) 4번 정도 있었거든. 첫차는 기관차가 다니고, 낮에는 동차가 다녔거든. 그때 사람들 많았지. 학생들도 많고 여주고 인천이니까 장사들이 많이 탔어. 인천에서 생선이나 소금 장사들도 많이 타고 그랬지. 소래나 군자로는 소금을 실어 나르는 임시열차도 있었어.” (최수현 / 수여선, 수인선 운행 철도기관사, 수원 매산동 거주)

Blog Single

수여선의 기본 구간은 수원, 용인, 이천, 여주다. 수인선을 매개로 해서 항구( 인천)와 최단거리로 직결되어서, 식민지형 경제수탈 노선으로서의 기능을 동시 에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수여선의 세력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전통 교통기관 을 대체하는 지역 간선 교통수단으로 기능하였다. 이는 당시 수여선의 세력권을 보면 알 수 있다. 수여선은 중앙선인 경부선에서 뻗어 나와 지역의 오지를 연결 했다. 수여선을 운영한 조선경동철도주식회사는 철도뿐 아니라 자동차 운수업, 선박운수업, 창고업 등을 함께 했다. 실제로 조선경동철도주식회사에서는 수여 선을 완전 개통한 뒤 1년 만에 기차의 종점인 여주에서 강원도 원주의 홍호리를 잇는 선박 산업을 시작했다. 또한 동시에 원주까지 정기 화물 트럭 노선도 개설 했다. 결국 당시 수여선은 단순히 지역 열차를 넘어 교통 물류의 큰 축을 담당했 던 것이다. 강원도 원주에서 배로 실어온 물건은 수여선을 타고 수원으로 갔다. 거기서 상 당량은 수인선을 타고 다시 인천으로 향했다. 수여선의 방향 자체가 당시 시대 를 반영한다. 수송 경로가 조선시대처럼 대 서울을 주력으로 한 국내이동으로 완결되지 않았다. 식민지 통치라는 특수 상황이었기에, 물자가 서울보다 인천이 라는 항구로 가는 것이 중요했던 시기였다.

새로운 시대, 기차를 타고 오다

수여선이 처음 개통되었을 때 당시 기차 삯은 수원~여주간이 오십 전이었다. 당시 쌀이 한 말에 1원이던 시절이었다. 처음에는 기차의 손님을 모으기 위해 무릎 밑 스커트 차림의 여차장을 기용했다.3 당시 신여성인 여차장을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종점에 도착해서도 자리를 뜨지 않아 차장과 실랑이 를 벌이기도 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수여선은 수원과 여주를 잇는 첫 기 차였다. 사람들은 수여선을 통해 조금씩 세상을 넓혀 나갔다. 그렇게 기차를 따 라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문명을 실어다 준거죠. 다른 지역과 그전에는 접촉이 별로 없었거든요. 근데 서로 만날 수 있게 된 거죠. 그래서 서로 만나고 이야기도 듣고. 안성이나 이런데 구경도 하고 했죠. 당시에 어떤 분은 수여선을 어릴 때 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하시면서 당시에는 쇳덩어리가 굴러가는 걸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았다고 하시더라고요.” (김장환 / 용인문화원 사무국장)

해방 후, 지역민의 기차가 되다

해방 이후 수여선은 국유화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이 이 열차를 이용 하 였고. 9.28 수복 후에는 영국군, 터키군들이 수여선을 타고 중부전선으로 들어 갔다.4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의 삶이 제자리로 돌아오자, 수여선의 성격도 달라졌다. 일제 강점기에는 물자 공출과 징병, 징용 등의 수탈의 도구였다. 그러나 광복 후 에는 수원과 용인으로 통학하는 학생들의 통학 열차로 애용되었다. 또한 용인 지역의 농산물을 반출하는 통로이자, 수인선과 연결되어 서해안의 해산물을 공 급하는 역할도 하였다. 물론 당시에는 다른 교통수단들도 생겨났다. 일제 강점기 하루 2,3번만 다니던 버스가 1958년에는 대폭 증가한 것이다. 수여선의 수송능력은 버스보다 훨씬 컸다. 그러나 처음 개통한 이래 운행 횟수는 하루 5~6번의 왕복에 머물고 있었 다. 그리 많은 운행횟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에게 수여선은 여전 히 ‘신문물’이었다. 신작로가 아직까지 비포장이어서 속도를 못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버스 요금이 철도의 2배 정도나 비쌌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로 나갈 경우에는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수려선 동쪽 구간인 여주-이천 사 이의 각역에서 서울로 나갈 경우 수원에서 경부선을 이용해서 가려면 상당한 우회길이 되어, 이천에서 3번 국도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거리 단축이 되었기 때 문이다. 수여선을 이용하는 경우 최종목적지는 화성역인 경우가 많았다.5 당시 수원역은 경부선 교통결절지의 기능을 했고, 화성역은 상업 지역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화성역을 목적지로 가는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시장을 보러 가는 것을 목적으로 꼽았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남문 밖 영동시장 일대에 있는 시장을 이용했다. 수원은 193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경기도 남부지역 중심지로서의 기능이 높진 않았다. 그러나 6.25이후 피난민들이 몰려와 수원천 일대를 점거하고 무점포 시 장 지대가 형성되었다. 이것이 수원의 급격한 인구 증가와 맞물리면서 확대, 고 정화 되었다. 사람들이 점차 증가하자 영동시장 맞은편에 지동 시장까지 들어섰 다. 따라서 영동시장을 오가던 주민들의 거주지는 비단 수원시민만이 아니다. 수여선 전 구간에 분포하고 있었다. 수여선의 최초 부설 목적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화물 수송이었다. 그러나 화물 수송의 경우 1966년까지 꾸준히 증가하다가 급감하기 시작했다. 1966년 수원과 여주를 오가는 직행 버스 3대가 운행을 개시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도로의 사 정이 개선되었기 때문이다. 여객의 수는 줄지 않았으나, 여객 중 많은 수가 무임 승차를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점차 적자가 증가했고 1970년에는 연간 적자가 1 억 7,900만원에 이르게 되었다. 그 후 수여선은 철도로서 존속하기가 어려워지 면서 1972년 3월 31일자로 폐지되었다.

Blog Single

‘지금, 여기’에서 되돌아본 수여선의 의미

수원에서 여주까지 4시간 40분, 기차는 늘 느릿느릿 달렸다. 그러나 기차를 둘 러싼 시대는 빠르게 변했다. 일제시대, 해방, 전쟁 그리고 산업화 초기까지. 시 대가 요구하는 기차의 목적은 달랐지만, 수여선은 오로지 한 길을 달려왔다. 기찻길이 놓여지고, 기차가 오가면서 참 많은 것들이 새로워졌다. 점으로 존재 했던 지역과 지역이 선으로 연결됐다. 선과 선이 만나는 지점에 새로운 공간이 생겼다. 그 공간 위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풍경도 달라졌다. 사람들에게 수 여선은 단지 교통수단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수여선은 단순히 이동수단으 로서만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역사적 맥락과 그 위에 살아온 사람들의 삶이 유 기적으로 이해될 때만이 수여선은 진짜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가 힘든 수여선을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다시 되짚어봐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