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의 출현과 수원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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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의 출현

굉음을 내며 달리는 시커먼 놈! 그놈의 질주는 근대의 무자비함과 속도의 쾌락 을 알려주었다. 그 시커먼 놈은 바로 기차였다. 그것은 근대문명의 기호이자 시 간을 구속하는 일상을 상징하며 우리 곁으로 왔다.

철도 건설 - 근대화와 식민지 수탈의 이면

우리 조상은 새벽 닭 울음소리에 깨어나 일하고 어둠과 함께 잠드는 순환적이고 자연적인 삶을 수천 년 동안 이어 왔다. 그 자연적인 삶은 노동과 휴식이 철저하 게 구분되지 않은 일상이었다. 그러나 기차는 ‘정시 운행’을 통해 정확한 시간을 강제하였다. 그것을 탓하는 자를 시대에 뒤떨어진 ‘무지한 시골영감’으로 매도해 가며 기차는 시간에 속박된 근대적 시스템을 각인시켰고, 이 땅의 자연스러운 존재방식을 굉음을 내며 찢어 가고 있었다. 조선 오백 년을 지탱한 신분 질서인 양반과 상놈의 구분조차 1등석과 2등석 등 돈으로 계산되는 새로운 구분법에 무 력화되었다.

1900년을 전후하여 전 세계적으로 부설된 철도는 세계자본주의의 팽창과 산업 화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상징물이었다. 이는 근대적 교통수단에 머무르지 않고 ‘제국’의 위대함을 알리는 선전물이자 식민 지배를 강화하는 매개물이었다. 이는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한반도를 X자 형태로 철도를 부설한 일제는 한국의 물산과 일본의 군대를 대량으로 실어 나르면서 조선을 식민지화해 갔다. 경부 선은 1901년 9월 21일 서울 영등포에서, 같은 해 9월 21일 부산 초량에서 일본 자본의 경부철도주식회사에 의해 기공되어 4년 후인 1904년 12월 27일 완공되 었다. 1905년 1월 1일을 기하여 전선(全線)의 영업이 개시되었고 그해 5월 25일 서울 남대문정거장 광장에서 개통식이 거행되었다.

철도 부설은 한국의 자본주의화·식민지화·산업화·도시화·근대화 등 중층 적 변화와 연결되어 있다. 철도 부설의 주체가 일본제국주의였고 부설 자본이 일본자본이었기 때문에 철도는 일제의 침략성과 수탈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는 궁극적으로 한국의 내재적인 발전을 저해하고 왜곡·억압시켰다는 점에 서 커다란 아픔이었지만 당시 철도는 한국인의 삶에 엄청난 충격과 변화를 가 져왔다. 철도 부설로 발생한 상권의 변화는 한반도 전체를 들끓게 만들었다. 기차 길이 열리면서 기차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었다. 소위 역세권(驛勢圈)이 그것이다. 기차역은 장시가 있는 전통적인 도시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개설되 었고, 역 주변의 조선인 토지는 헐값에 수용되어 다시 일본인들에게 불하됨으로 써 역세권은 일본인들의 차지가 되었다. 이에 철도역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은 규 모 있는 도매업을 장악하였고, 조선인들은 그 아래에서 소매업을 함으로써 식민지 경제체제가 만들어졌다. 이는 전통적인 장시(場市)의 변화를 의미한다. 수원 의 상권은 전통적으로 화성의 성안시장과 성밖시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 다. 그러나 경부선이 개통되고 수원역이 팔달산 서남쪽에 생기면서 수원역을 중 심으로 하는 역세권이 만들어졌다.

경부선과 수원 상권의 변화

수원군 남부면 매산리는 1905년 이전까지 넓은 벌판에 비해 몇 가구 살지 않았 던 한적한 마을이었다. 팔달산 서쪽지역은 성안 사람들의 처지에서 보면 동문 밖만큼 시골로 인식되고 있었다. 반월과 남양과 발안 등지로 오가는 길목으로 유용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1905년 경부철도가 매산리를 지나고 철도역이 자 리하면서 매산리는 새롭게 각광받는 땅이 되었다. 어쩌면 근대 수원 100년의 역 사에서 매산리만큼 역동적인 변화를 겪은 마을도 없을 것이다. 한적한 시골에서 일약 수원의 관문으로서, 수원역이 위치한 마을로 수원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거 듭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매산리는 상전벽해, 천지개벽과 같은 변화를 겪은 곳 이다. 철도 노선이 확정되면서 1903년 한성-수원간 전신이 개통되었고, 우편수 취소도 매산리에 설치되었다. 이것이 이후 수원역전우체국이 되었다. 이에 매산 리는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는 길목이 되었다.

수원역 일대와 그 서쪽 여기산 자락에 권업모범장이 설치되고, 농림학교(서울농 대)가 자리하면서 수원은 서쪽으로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수원역에서 시작하여 점차 동쪽으로 전통적인 남문 상권을 향하여 일본 인 자본은 잠식하며 들어왔다. 일본인 농사이민을 위한 동산(東山)농장과 국무 (國武)농장, 동척(東拓) 사무소 그리고 식산(殖産)은행 등 일본인 이주민들을 위한 금융기관들과 상점들이 대거 들어서면서 수원역 앞 매산리는 본격적으로 개 발되기 시작하였다. 팔달산 자락으로 일본인소학교와 수원신사(神祠) 및 일본의 종파불교를 위한 사찰들이 들어왔다.

1910년대 수원역 앞의 매산로 진입로 사진을 보면 조선운송점과 야마모토여관( 山本旅館)의 간판이 눈에 띈다. 이들 역시 일본인들의 주요한 사업체라 할 수 있 다. 1930년대 중반 매산로 입구 풍경을 보면 왼쪽의 조선운송점은 과일가게로, 오른쪽 여관은 호소카와상점(細川商店)으로 바뀌면서 좀 더 규모가 커진 건물로 변화되었다. 이렇듯 수원역 일대는 일본인들의 상권으로 점점 확대되어 갔다. 현재 성안에서 3대 이상 살아온 사람을 찾기란 매우 힘든 게 현실이다. 한국전 쟁과 1970~1980년대 동수원 개발로 대규모 아파트가 건설되면서 성안에 살던 사람들이 대거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이미 1905년 경부 선 철도가 놓이면서 시작되었다. 기차는 일상에 속도를 불어넣었고 공간을 무시 하게 만들어, 수원을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땅으로 위치 지었으며, 흡인력이 강한 서울 집중 현상을 더욱 심화시켰다. 즉 철도는 수원과 서울의 체감거리를 좁힘으로써 ‘서울과 너무 가까운’ 도시 수 원에서 돈 많고 소위 ‘깨친’ 사람들을 서울로 이주하여 살게 만들었다. 이는 2004년부터 운행하기 시작한 고속철도(KTX)의 도움으로 천안과 대전지역에 학교와 직장을 둔 사람들이 그 지역에 거주하지 않고, 서울이나 수도권 등에서 통근할 수 있게 된 것과 유사한 사례이다.

경부선이 개통된 몇 년 뒤인 1910년 수원역을 통해 쌀과 콩 그리고 땔나무가 가 장 많이 실려 나갔고, 목재·석유·연와(煉瓦)·명태(明太) 등이 수원에 부려졌 다. 특히 명태는 북쪽 원산에 집결된 후 장돌뱅이들의 발품을 통해 전국으로 유 통되었던 물건이었다. 그러나 경부철도 개설 이후 명태는 원산에서 배를 통해 부산으로 와서는 곧바로 기차로 실려 전국으로 팔려 나갔다. 이에 따라 기차는 장돌뱅이들의 몰락을 가져왔고, 역과 먼 거리에 자리한 전통 적인 장시(場市)의 쇠퇴를 이끌었다. 이에 비해 기차역이 지나는 장시는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였고, 그 일대는 대도시로 변화되었다. 그 대표적인 도시가 천안, 대전 등이었다. 이런 점에서 기차역이 위치한 수원·오산·평택은 남쪽으로 가 는 제주로(濟州路)의 전통적인 대로(大路)의 혜택에 더하여 기차 운송에 따른 각 종 수혜를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수혜의 대상이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들이라는 점이 문제였지만.

수원은 전통적으로 화성의 남문, 즉 팔달문 주변이 최대의 상권이었다. 그러나 경부선이 뚫리면서 수원의 서쪽 변두리에 불과했던 수원역 주변은 새로운 상권 으로 부상하였다. 이에 수원역 주변으로 일본인들이 대거 진출하면서 이들을 위한 편의시설도 수원역 주변에 집중되었다. 1906년 일본인 소학교가 수원역 가까운 곳에 설립되었고, 수원역전우편소와 신사가 설치되었다. 또한 권업모 범장(농사시험장)과 농림학교가 서둔리에 설치된 것도 정조 때 축조된 축만제 (서호)의 이점을 살린다는 점과 더불어 수원역에서 멀지 않다는 점이 크게 고 려되었다.

경부선 개통 이후 수원은 전통적 6대로의 해남로(제주로)라는 교통의 요지에 더 하여 철도 수송의 편리함으로 경기남부 지역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수원군 관내에 수원역을 비롯하여 병점역, 오산역이 지나가게 되면서 이들 지 역의 급격한 변화도 이루어졌다. 특히 오산은 기존의 오산장과 더불어 오산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면서 경제적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1920년대가 되면서 20만 이상의 규모가 되는 장시는 경기남부 지역에서 수원장 을 비롯하여 오산장과 안성장이 보인다. 오산장의 성장은 조선후기 이래 경기남부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큰 장이었던 안성장을 압도하는 것이 되었다. 안성은 철도 부설을 강력히 반대한 지역으로 경부선은 진위(평택) 땅으로 부설되고 급 기야 평택이 안성을 누르고 급성장하는 것을 바라봐야만 했다. 오산 역시 철도 교통의 물류 수송의 이익을 통해 성장의 폭이 다른 지역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 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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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여선과 수인선, 사통팔달의 수원을 만들다

경부선 개통 이후 30년이 지난 1930년대 수원과 여주를 잇는 수여선(水驪線), 수원과 인천을 연결하는 수인선(水仁線)이 부설되었다. 이로써 수원은 경기 남 부를 동서남북으로 연결하는 철도교통의 요충지가 되었고, 수원의 위상과 역할 은 보다 더 확장되었다.

일제시기 수인선과 수여선은 조선경동철도주식회사(朝鮮京東鐵道株式會社)가 운영한 것이었다. 경동철도는 수원에 본사를 두고 경기도 내륙지방 철도운수업 과 자동차운수업, 선박운수업, 창고업 등의 운수영업을 하던 회사였다. 경동철도는 1920년 3월 1일 수원에서 여주까지 협궤 증기철도선의 부설을 허가 받았다. 그러나 수여선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1930년 2월 5일 기공식을 갖고 8 개월 만인 1930년 11월 30일에 겨우 개통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이에 1930년 12월 1일부터 개통된 수원-이천 구간(53.1㎞)이 개통되어 운행에 들어갔다. 그 리고 이듬해인 1931년 12월 1일 이천-여주 구간(20.3㎞)이 개통함으로써 수여 선 전체가 완성되어 연결되었다. 정식 정거장은 수원역과 용인역 및 여주역 등 3개 역이었고, 간이역은 덕곡·삼가·마평·표교·무촌·죽당·신대 등 7개 역이었다.

수원 - 본수원 - 원천 - 덕곡 - 신갈 - 어정 - 삼가 - 용인 - 마평 - 양지 - 제일 - 오천 - 표교 - 유산 - 이천 - 무촌 - 죽당 - 매류 - (광대리) - 신대(연라리) - 여주

경부선의 수원역에서 갈라진 수여선은 매교를 지나 기존의 남문 상권과 가장 근 접한 인계동을 지나가면서 역명을 본래의 수원에 가깝다는 의미로 ‘본수원(本水 原)’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경부선의 수원역은 이미 전국적 지명도 를 얻은 번듯한 역사를 갖게 되었음에 비해 본수원역은 본래의 수원을 상징하기 에는 역부족이었다. 해방 뒤인 1948년 1월 운수부(運輸部)에서 역명을 일부 개정할 때 수여선의 본 수원역은 ‘화성역(華城驛)’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화성역으로 불리며 1972 년까지 수여선의 주요한 역으로 기능하였다. 해방 이후 약 4반세기 동안 수원의 동쪽 용인에서 오는 사람들은 화성역을 통해 수원으로 입성하였다.

개통 당시 수여선 73㎞ 구간에서 열차는 하루에 수원발 5편, 여주발 4편이 운행 되다가 1938년부터 각각 4편씩 운행하였는데 수원에서 여주까지 4시간 40분이 소요되었다. 수원에서 출발하는 수여선은 첫차가 7시 08분을 시작으로 11시, 12 시45분, 막차가 17시10분에 출발하였다. 이후 1941년 12월에 개정된 것에 따르 면 4편 가운데 그나마 11시에 출발하는 기차는 용인까지만 운행하는 것이었다. 수여선 부설 계획 당시는 화물 수송이 많을 것으로 예상하였지만 실제 여객 수 송의 비중이 높았다. 1932년 경우 총수입의 60%가 여객 수송이었다.

수여선은 수원지역 학생들의 수학여행을 위해 활용되었다. 여주 지역을 다녀오 는 코스였는데, 수원역에서 7시 8분에 출발하는 첫 기차는 여주에 도착하면 11 시 50분이었다. 기차를 타고 여주에 내려서는 곧 점심때가 되었다. 그리고 여주 영릉과 신륵사 등지를 답사는 수학여행을 기억하는 수원 사람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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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실상 수원사람들보다 수여선의 이용은 여주와 이천, 그리고 용인 사람 들이 수원장을 비롯하여 수원을 왕래하는 주요한 교통수단으로 유용하게 활용 되었다. 즉 수여선이 개통되면서 용인, 이천지역의 학생들이 수원으로 통학이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용인지역의 학생들은 본수원역(화성역)에서 내려 화성 학원(수원상업학교)과 삼일학교로 통학이 보다 쉽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수 여선의 실질적인 혜택을 받은 것은 수원과 여주가 아니라 용인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해방 후 이천군 능서면의 매류역과 신대역 사이에 광대리역이 더 생겼지만 수여 선은 1972년 3월 31일로 폐선되었다. 1930년 개통된 지 42년 만의 일이다. 1972년 3월 경제개발5개년계획 수립과 함께 영동고속도로는 1971년 3월에 기 공하여 같은 해 12월 21일에 신갈-새말 간 104㎞가 준공되었다. 이후 새말-강 릉 간 97㎞ 구간은 1974년 3월 기공하여 1975년 10월 14일에 준공되었다. 이로 써 수여선 구간과 거의 일치하는 영동고속도로 구간이 완공됨에 따라 빠르고 편 리한 도로를 이용한 교통수단의 발달로 인해 느리고 불편한 협궤열차는 종말을 맞이하였다. 즉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철도교통 중심에서 도로교통 중심으 로 교통정책이 변화되는 상황에서 수원과 여주 사이에 4시간 이상이 걸리는 느 릿한 협궤열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없어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수여선의 존재와 의미에 대하여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수인선은 1926년 인천상업회의소가 조선총독부에 「인천에서 수원을 거쳐 동해 안 강원도 강릉에 이르는 횡단철도 부설 요망서」를 제출하면서 구체화되었다. 경동철도는 1935년 9월 23일 수인선 철도 부설인가를 받았다. 1936년 6월 1일 기공식을 거행하였고, 수인선은 착공한 지 1년 2개월 만인 1937년 8월 6일 개통 되어 정식 운행에 들어갔다. 수원에서 출발하여 사리-원곡 등 지금의 안산지역 연안을 따라 인천까지 이어 진 수인선은 일본 자본에 의한 조선 수탈의 상징적 존재였다. 경동철도주식회사 가 공사에 착수한 지 2년 만인 1937년 8월 6일 개통되었는데, 이때는 만주침략 과 중일전쟁으로 일본 군수업자와 산업자본가에게는 호시절이었다. 이미 1931 년 수원에서 여주까지 개통된 수여선과 수인선을 연결하여 하루 5번씩 운행함 으로써 경기 내륙의 질 좋은 쌀과 군자만 일대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쉽게 인천 으로 반출하고 일본제 상품들을 내륙 깊숙이 판매할 수 있었던 것이다. 총연장 52㎞의 협궤선(762㎜)인 수인선은 17개역을 통과하였다. 수원에서 인 천까지 보통 1시간 40분이 걸렸다. 수원·고색·어천·일리·원곡·군자·소 래·남동·송동·인천항 등 10개의 정식 정거장과 역사와 역원이 없는 7개의 임시 정류장으로 구성되었다.

수원 - 고색(古索) - 오목(梧木) - 어천(漁川) - 야목(野牧) - 빈정(濱汀) - 일리(一里) - 성두(城頭) - 원곡(元谷) - 신길(新吉) - 군자(君子) - 소래(蘇萊) - 논현(論峴) - 남동(南洞) - 문학(文鶴) - 송도(松島) - 인천항

해방 후 경동철도의 사철이었던 수인선은 국철로 전환되었으나 이후 경제 발전 과 더불어 도로교통이 발달하면서 그 기능이 위축되었다. 역의 존폐가 거듭되고 간이역의 비중이 높아지는 등 쇠퇴일로를 걷다가 1973년 7월 13일 수인선 구간 중 남인천-송도 간 5㎞ 구간이 폐쇄되었다. 인천도시계획에 따른 것으로 수인 선 가운데 처음으로 폐쇄된 사례가 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1977년 42번 국도가 포장되어 수인선의 화물 운송기능이 도로교 통으로 이동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화물 수송이 급감하자 1977년 9월 1일 부터 객차와 화차가 혼합된 증기기관차를 여객수송만 전담하는 디젤기관차로 교체하면서 화물수송이 전면 중단되었다. 이후 수인선은 선변 농어민, 통학생등의 제한적인 여객수송 기능만을 담당하며 명맥을 이어 가다가 1961년 수원- 인천 간 하루 5회 왕복하던 편수가 1962년부터 4회로 축소되었고, 1990년대 들 어서 다시 3회로 줄었는데, 운행차량도 주중 2량, 주말 3량으로 함께 축소되어 운행하였다. 그럼에도 수인선과 수여선의 협궤열차는 한동안 낭만을 찾는 영혼 들을 위한 탈출구 역할을 하기도 했다.

허기진 영혼과 일상의 권태를 못견뎌 하며 느닷없거나 뜬금없이 수인선(水仁線) 협궤열차를 타봤던 청춘들은 또렷이 기억하리라. 덜컹거리며 느릿느릿 달리는 협궤열차의 겉모습과는 달리 기차 안 풍경은 마주 보고 앉은 사람들의 낯설지 않은 시선과 서로 아는 사람들의 왁자한 인사 속에 비릿한 새우젓 냄새까지 하나가 되어 흘러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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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한 대도회 인천과 수원을 나드는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던 이 협궤열차는 해 방 이후에도 고작 부천 가는 버스 외에 변변한 버스노선이 없었던 안산 사람들 에게는 중요한 것이었다. 사리와 소래포구는 수인선 덕분에 싱싱한 갯것들을 수 원과 인천 사람들에게 팔 수 있어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수도권 개발과 전철이 대중화되고, 수원-안산-인천의 축선보 다 수원-서울, 안산-서울, 인천-서울 간 물류 이동이 서울 중심으로 확대되면 서 수인선은 ‘애물단지’로 전락하였다. 이에 철도청은 송도-한양대 26.9㎞ 구간 을 1994년 9월 1일자로 폐쇄하여 수원에서 한양대만을 운행하였다. 그러나 이 듬해 1995년 12월 31일 운행을 마지막으로 한양대-수원 20㎞ 구간마저 폐선함 으로써 수인선은 개통 58년 만에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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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은 북쪽의 서울과 남쪽을 이어 주는 삼남대로의 중심 축선에 위치하여 도시 자체가 남북 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 남북 축선을 중심으로 물자와 사람 의 흐름을 더욱 강화한 것이 철도의 역할이었다. 수원의 처지에서 보면 화성 주변의 남북 축에서 서쪽으로 이동되어 설치된 수원 역은 수원 상권을 서쪽으로 확장시켰고 수여선과 수인선의 부설은 동서 축의 역 동성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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