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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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모두 각자만의 삶의 속도가 있다. 한 평생 기차와 함께 살아온 최수현 할아버지의 삶의 속도는 기차의 속도다. 어떤 기차를 운전하느냐에 따라 할아버지의 삶의 속도도 완행과 급행이 되었다. 할아버지의 기차는 전쟁 중에도, 아이들 졸업식에도, 새벽에도, 한밤중에도 멈출 줄 모르고 달렸다. 세상은 기차 앞의 커다란 창을 통해 할아버지에게 왔다 갔다. 그렇게 기차와 나란히 할아버지는 한 세월을 달려 왔다.

최수현 할아버지 집에는 보물이 많다. 매일 착용했던 1등 기관사 배지, 40여 년 전 사라진 수여선 열차의 지도,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찍은 각종 사진 등 삶의 소중한 시간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보관되어 있다. 그렇지만 할아버지의 가장 큰 보물은 ‘기억’이었다. 인터뷰 하는 동안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특급 열차를 타고 만주로 가던 어린 소년, 기관사 학교 시험을 쳤던 청년, 전쟁 중에도 멈추지 않고 달렸던 기차, 그리고 아내와 함께 했던 수많은 여행들까지. 할아버지는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던 기억들을 하나, 둘 꺼내 보여주셨다. 그 속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우리의 이야기가 있었다.

할아버지 어릴 적

할아버지가 태어난 곳은 충청남도 공주에 있는 최씨네 마을 집성촌이다. 최씨들이 여섯 마을을 이루고 500년을 살아온 곳이다.

“어릴 때 우리 집이 잘 살았어요. 할아버지가 강릉에서 능참봉을 하시다가 공주의 최씨네 집성촌로 내려온 거야, 우리 아버님은 머슴 둘, 소 두 마리 두고 돌아가실 때 까지 할아버지 재산을 가지고 여유롭게 잘 살다 가셨어요. 당시에 우리 아버님은 공주 경찰서장하고 자전가 타고 같이 다닐 정도로 유지였어. 어머니도 공주 군내 제일가는 미녀였지.”

어머니는 17살 어린 나이에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그 후로는 손이 들어서지 않았다. 그리고 소년 최수현이 10살 때 아랫마을 잔치에 다녀오시다가 급체로 돌아가셨다.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사라진 소년의 삶은 어땠을까. 이제는 백발의 할아버지가 되었지만, 어머니를 멍석에 말아 장례를 하던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 뒤로 아버지가 새장가를 들기도 했지만 손을 보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집안의 하나뿐인 귀한 외아들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귀한 외아들을 호시탐탐 노렸다. 일제 말기가 되자 무차별적 징벌이 시작되었다. 할아버지는 하나 뿐인 손자를 지키기 위해 특별한 결심을 했다. 만주에 있는 일본인 지인에게 소년 최수현을 보낸 것이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15살 때 만주를 갔어. 군대 안 가려고 그랬지. 일본 놈들이 그 때 막 잡아갔거든. 할아버지 손자 하나 있는 거 잡혀가면 큰일 난다 싶어서 만주에 보냈어. (무섭진 않으셨어요?) 무서워도 가야지. 어쩌겠어. 그때는 가라고 하면 가는 거여. 특급 열차를 탔고 갔어. 짝수면 동경 방향. 홀수면 서울 방향이었고, 기차 삯이 40원이었어. 그거 타면 대전에서 봉천까지 한 번에 갔거든. 그 기차가 신의주 지나서, 봉천 지나 신경까지 가는 거였어. 기차를 얼마나 탔더라...그건 기억이 잘 안나. 기차에서 내내 굶었지 뭐. 사먹을 줄도 몰랐지. 열차 안에 일본 헌병이 왔다 갔다 하니까 (무서워서). 근데 나이가 어리고 애 같으니까 아무것도 안 하더라고.”

만주에 내린 소년에 들린 것은 주소 하나뿐이었다. 소년은 물어물어 집을 찾아갔다. 가장 먼저 배운 말은 ‘중국말을 나는 모른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만주 할아버지 친구 집에서 2년을 지냈다. 할아버지 친구는 만주 의과대학 교수로 일본 사람이었다. 할아버지는 집안에서 온갖 심부름을 하며 지냈다. 병원도 가고, 물건도 사오라고 하면 사다왔다. 영민했던 소년은 심부름을 곧잘 했고, 그 사이 일본말도 많이 늘었다. 그렇게 2년여를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만주로 전보가 왔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거야. 그래서 집으로 왔지. 근데 집에 와서 보니 그게 거짓말이었어. 내가 장손인데 혹시 안온다고 할까봐. 거짓말을 한 거지. 암튼 그래서 집으로 온다고 만주에서 기차를 타고 대전역에 내렸어. 근데 그때 역에 뭐가 붙어 있는 거야. 자세히 보니 그 (철도서울중앙기술양성소모집) 공고야. 모집하는 과가 역무과, 보선과, 전기과, 운전과야. 근데 다른 과는 군대를 가요. 그런데 기관사만 군대를 안 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운전과에 지원했지.”

전국에서 100여명이 몰려와 용산 역전에서 시험을 봤다. 시험 문제는 ‘석탄, 철도, 기차’ 등을 일본어로 적는 거였다. 만주에서 일본인 가족과 함께 생활하다가 돌아온 할아버지에게는 매우 쉬운 문제였다. 무난히 합격했다. 합격하기 전까지 집에서는 시험을 본지도 몰랐다고 한다. 최종 합격 후 말씀드리니 아주 좋아하셨다. 최씨네 집성촌 여섯 마을에서 공직은 최수현 할아버지가 처음이었다.

“우리 동기생이 45명이었는데 막상 입학 할 때가 되니까 5명은 안 왔어. 저 멀리 함경도 평안도 이런데 있는 애들이 너무 멀어서 안온거야. 그리고 40명이 같이 공부했지. 학교는 청량리 서울대 문리대 옆에 있었어요. 학비는 전액 무료였고, 기숙사도 있어서 아주 편하게 지냈지. 공부 할 때는 한강에 가서 석탄 때는 연습을 했어요. 사다리를 옆으로 놓고 그 구멍사이로 석탄 집어넣는 연습을 한 거지. 그렇게 2년 과정을 마치고 여기저기 배치되었어. 나는 졸업 후에 바로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발령을 받아 일을 시작했어. 가장 먼저 발령이 난 곳은 천안 기관차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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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직한 그 해 결혼도 했다. 최수현 할아버지보다 1살 어렸던 아내는 엘리트 여성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소서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대소서는 행정적인 일을 잘 못하거나 문서작성을 못하는 사람들의 서류를 대신 써주는 곳으로 아무나 취직할 수 없는 곳이었다. 45년 초에 만났다가 해방 되고 바로 결혼했다. 신혼집은 처갓집 근처인 평택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47년에 첫 딸을 낳았다. 그리고 50년, 전쟁이 나기 전에 수원으로 이사 왔다. 아이가 태어나고 집을 늘려가고 매일 기차를 타고 출근하고 평범한 일상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전쟁이 났고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전쟁 중에 기차는 매우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피난민들은 기차에 올라타기 위해 벌떼같이 몰려들었다. 항구로 배달해야 하는 화물들도 많았다. 기차는 반드시 달려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차는 저절로 움직이지 않는다. 누군가는 반드시 운전을 해야만 했다. 할아버지의 일상은 기차와 함께 아슬아슬한 철로 위를 끊임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전쟁이 나서 갑자기 집에도 못가고 피난 열차를 몰게 된 거야. 수색역에서 열차를 끌고 내려왔는데 조치원에 와서 피난민들 다 내리게 하더라고. 그러더니 백미 쌀을 싣고, 대전으로 내려갔어. 당시에 기관조수가 둘이었는데 하나는 앞 보고 하나는 석탄으로 불 때는 일했어. 집에서는 갑자기 내가 사라지고 연락도 안 되니까 난리 났지. 죽었다고 생각했대. 근데 뭐 연락할 방법이 있나. 한 세 달 그렇게 집에도 못가고 기차만 몰았나봐. 우리 집 사람이 딸아이를 데리고 대구까지 걸어서 피난을 간 거야. 나 죽은 줄 알고. 친척 따라서. 그리고 서울 수복되고 내가 집에 오니 난리 났지.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돌아왔다고. 내 생일이 음력 8월 28일인데. 그 전날 내가 집에 다시 올라 온 거야.”

그렇게 전쟁을 관통하며 기차는 계속 달렸다. 할아버지는 기관사 자리에 앉아 세월을 달렸다. 5남매를 낳고 키웠지만, 졸업식 입학식 한번 제대로 가보질 못했다. 일반 직장인 같이 정해진 출퇴근 시간이나 휴일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기차 시간에 따라 낮 근무, 밤 근무 사이에 쉬는 날이 휴일이었다. 72년까지 기관사로 근무했고, 그 후 5년간 사령실에서 근무를 했다. 전국에 몇 명 안 되는 1등 기관사가 된 것도 그쯤이었다.

“아침에 모자. 기관사 복 입고 출근해요. 그리고 책임자에게 인사하고, 몇 호라고 배차를 받아요. 그리고는 이상 유무를 점검하는 거지. 그렇게 준비가 다 되면 정류장에서 기다리지. 그러면 사람들이 다 타잖아. 정류장에 조역이 사람 다 탔다고 손 신로를 주면 출발했지. 빨강은 서고 파랑은 가라는 신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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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당시 수원과 여주를 이었던 협궤열차, 수여선도 운전했다. 다른 열차보다 폭이 적어 ‘꼬마 기차’라고 불렸다. 지금도 수원역 앞에는 급수탑의 흔적이 남아있다. 기차는 출발하지 전에 항상 이곳에서 물을 받아서 출발했다.

“수여선, 수인선은 하루에 4번 정도 있었거든. 첫차는 기관차가 다니고, 낮에는 동차가 다녔거든. 그때 사람들 많았지. 학생들도 많고 여주고 인천이니까 장사들이 많이 탔어. 인천에서 생선이나 소금 장사들도 많이 타고 그랬지. 소래나 군자로는 소금을 실어 나르는 임시열차도 있었어.”

수원에서 여주까지 73km, 수여선으로 달리면 4시간 40분이 걸렸다. 기차를 운전해서 역에 도착하면 그곳에는 기관사들이 밥을 먹고 쉴 수 있는 장소가 있었다. 밥값은 월급에서 제했지만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복지였다. 할아버지는 월급이 18000원 정도였다고 기억했다. 기관사 등급에 따라 수당이 달랐다. 1등 기관사는 15000원, 2등 기관사는 10000원, 3등 기관사는 5000원이었다. 당시로서는 적은 월급은 아니었다. 그러나 5남매를 키우기다보면 목돈이 들어갈 일이 많았다. 똑똑하고 강단 있던 아내는 맞벌이를 해가며 딸, 아들 구별 않고 전부 공부를 시켰다. 최수현 할아버지를 인터뷰 하는 자리에 둘째딸은 어머니의 기억을 쏟아냈다

둘째딸 이야기

72년이었나 봐요. 당시에는 공무원 월급이 많지 않잖아요. 내 기억에는 십 만원 정도 된 것 같아요. 그런데 납부금이 9,000원인거야. 그때 내가 고1이고 우리 오빠가 고3이었거든요. 두 명을 한꺼번에 내야 하니 얼마나 큰 돈이야. 그때 엄마가, 금반지를 팔아서 (울음..) 나에게 먼저 납부금을 준 거에요. 나는 어리니까 이런 걸로 기죽으면 안 된다고. 엄마는 아들 딸 편견 없이 가르쳤어요. 엄마가 계속 우리를 키우면서 바느질을 했거든요. 어렸을 때, 매산 시장에서 양장점을 했어요. 그러다가 우리를 키워야 하니까 가게를 접고, 집에서 바느질을 했어요. 사람들이 집으로 맞추러 오고 그랬어요. 그럼 옷을 배달해주고 이래야 했는데, 어린 마음에 그게 제일 싫었어요. 누구네 집에 갔다 주고 돈 받아오라고 그러거든요. 그럼 사람들이 다 없던 시절이니 돈을 주나요. 몇 번씩 가야 되고, 안줘서 허탕 치면, 또 가야되고, 그게 싫었어요. 그래도 그렇게 어머니가 계속 맞벌이를 하셔서 우리도 다 공부하고, 후생주택에도 들어가고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 수원에는 후생주택으로 지어진 집이 12채 정도 있었다. 지금으로 비유하자 면 고급전원주택 같은 곳이다. 당시 그곳에 들어가기는 하늘에 별따기 만큼이나 힘들었다. 돈과 운이 모두 필요했다. 최수현 할아버지는 어렵게 기회를 잡게 되 었고, 아이들이 장성해 시집, 장가갈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단독 주택인데 방이 3개에요. 당시에는 매우 큰 집이었지. 마루에 창문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실내 화장실이 있었어요. 당시로는 그런 집이 없으니까. 얼마나 좋아. 물론 그것도 재래식이기는 했어요. 변기뚜껑을 해가지고 냄새 안 나게 막아 놓고 했었거든요. 그래도 바깥으로 화장실 갈일이 없었으니까 너무 좋았죠. 그리고 부엌에도 수도가 있었어요. 당시에 안에 수도가 있는 것은 획기적인 것이었어요. 싱크대가 조각타일로 만들어진 긴 부엌이 있었어요. 물 길어먹던 시절인데 안에 수도가 3개가 있고, 밖에 1개가 있었으니 정말 좋죠. 당시에는 후생주택에 산다고 하면 부자라고 엄청 부러워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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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5남매와 두 부부는 일상을 차곡차곡 채워가며 살았다. 아내는 남편이 일을 나가는 시간에 맞춰 아이들을 모두 깨웠다. 새벽시간에 아이들은 졸린 눈 을 비비며 아버지와 함께 밥을 먹었다. 남편은 아내를 대신해 아이들을 씻기고, 방걸레질을 했다. 그렇게 두 부부는 나란히 달리는 기차처럼 한결 같이 서로를 의지하며 한 평생을 살아왔다.

할아버지는 퇴직하기 전 중앙선에 올라와서 종합 사령관실에서 근무했다. 종합 사령관실은 전국의 모든 기차를 컨트롤하는 곳이었다. 책임이 막중한 자리이자 명예로운 자리였다. 혹시라도 착오가 생기면 대형사고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 었다. 모든 기차는 상황실에서 지정하는 데로만 움직일 수 있다. 최수현 할아버지는 70년대에 5년 정도 종합 사령관실에 근무했다. 그리고 수원 에서 총 책임자로 있다가 은퇴 직전 다시 상황실에 올라갔다. 그리고 88년 6월 31일에 정년퇴직을 했다.

평생 기차의 앞에만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편안한 뒷자리로 왔다. 삶의 속도를 이제 아내와 함께 맞추기 시작했다. 동대표 일 등을 하면서 마을일을 했다. 평생 강직하고 곧게 살아온 그대로였다. 그리고 안 가본 나라가 없을 만큼 많은 곳을 여행을 했다.

그렇게 서로를 의지하며 살았던 두 부부에게 갑작스러운 이별이 찾아왔다. 건강 하던 아내가 어느 날 황망하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어머니가 뭐든지 배우는 걸 좋아하셨어요. 노래교실, 고전 무용. 장구, 포장 공예 같은 걸 계속 배웠어요. 도서관에도 잘 다니고, 책도 많이 읽으셨어요. 그래서 치매나 그런 것 때문에 염려 안 하셨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로즈마리 향기가 안 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가 7월이었는데. 그래서 동네 이비인후과를 갔더니 감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약먹고 그랬는데도 안 낫는 거예요. 그러다가 큰 병원에 갔더니 코 안에 암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가 1월 달에 돌아가셨어요. 당시 볼레로를 뜨던 게 있었는데, 마무리를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울음) 아직도 안 믿겨요.”

남은 가족은 갑자기 어머니 없는 삶속으로 던져졌다. 가족 모두의 삶에는 큰 구 멍이 생겼고, 그 구멍으로는 늘 찬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가장 큰 구멍은 아마 도, 최수현 할아버지의 가슴 속에 있을 것이다. 사실 인터뷰 내내 최수현 할아버 지는 아내의 이야기를 많이 하진 않았다. 그러나 딸은 지금도 종종 아버지가 엄 마의 사진을 보며, “밥 먹었소.” “여보 애들이 왔다 갔소.”이야기하는 모습을 본 다. 평범한 이야기와 잔잔한 목소리에 담긴 깊은 슬픔은 본인만이 알 것이다. 인 터뷰 말미에 우문인줄 알면서도 물었다.

(외로우세요?)
그거야 말할 것도 없지.
(어떨 때 생각나세요?)
그런걸 왜 물어? 에휴...(한숨)

인터뷰는 이틀에 걸쳐 장시간 이어졌다. 노년의 할아버지에게는 무척 피곤한 일 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아이 같은 눈빛으로 이야기를 계속 쏟아냈 다. 할아버지는 인터뷰 내내, 자신이 간직해 온 추억 기차의 문을 활짝 열어 주 었다. 할아버지에게 이끌려 추억 기차에 올라탄 필자는 할아버지와 함께 긴 여 행을 한 듯하다.

여행지는 기관사 최수현이 아니면 데려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 곳은 지금껏 필 자가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사라져버린 곳이다. 그러나 그 세계 속에는 우리가 잠시 잊고 있던 우리 삶의 원형이 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하는 이유다.

최수현 할아버지 연보

1928년
8월 28일 충청남도 공주군 반포면 도압리 551번지, 최씨 집성촌에서 출생. 외아들이었음

1937년
10살. 어머니가 급체로 갑자기 돌아가심

1941년
15살. 초등학교 졸업 후 군대에 징병되지 않기 위해서 할아버지 지인이 있는 만주에서 2년간 지냄

1943년
17살. 만주에서 돌아와서 대전역에 내렸다가 ‘철도서울중앙기술양성소’ 모집 공고를 보게 됨. 기관사가 되는 운전과만 군대 면제라서 운전과에 지원함. 전국에서 100여 명이 응시했고, 그 중 45명이 선발됨

1945년
19살. 결혼, 기관 조수 생활 시작

1947년 큰 딸 출생

1950년
6.25 전쟁 중 화물과 피난민을 실어 나르는 열차 운전 당시 아내는 어린 딸을 업고 걸어서 대구까지 피난 떠남 음력 8월 28일날 집에 돌아옴

1952년 큰 아들 출생

1953년 둘째 딸 출생

1957년 둘째 아들 출생

1959년 셋째 아들 출생

1970년대
기관사 생활 계속 1등 기관사 배지를 받음

1972~1977년
종합사령관실 근무

1980년대 초
수원총책임자로 내려와 근무

1980년대까지
수원후생주택에서 생활

1988년 6월
은퇴 직전, 종합사령관실에서 다시 근무. 기관사 생활 은퇴

1990년대 이후
기관사 동료들, 아내와 함께 여행 다님. 마을 일들을 함

2008년 아내 사망

현재
많은 사람들이 떠났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과 함께 지냄 기관사 계모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둘째 딸이 일주일에 1, 2번 정도 와서 집안일을 봐줌. 그렇게 할아버지의 삶은 계속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