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걷고,
세월을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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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영 선생을 만나게 된 건 수여선에 관련한 구술자를 찾을 무렵 직접 자료와 글을 보유하고 계시다는 연락을 받고서였다. 사이다 마당에 앉아, 건네주신 사 진과 사용하셨던 지도, 직접 쓰신 수여선에 관한 글을 보며 간단한 이야기를 들 었다. 그렇게 첫 만남을 갖고 돌아와 수차례 선생의 글을 읽어보았다.

저절로 되는 것은 없다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내 삶을 지키기 위해 글을 쓴다. 윤필영 선생의 글은 나에게 이런 의문을 던져주었다. 왜 이런 글을 쓰셨는가? 그에게 더 듣고 싶어질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윤필영 선생과의 두 번째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올해로 예순여섯이신 윤필영 선생은 1950년, 경기도 수원에서 4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첫째 형과는 무려 스무 살 차이가 나는 늦둥이 아들이었다. 귀여움을 받을 만도 한 넷째이건만, 무서웠던 형과 무뚝뚝한 아버지의 기억이 대부분이었고 공부 한 자 가르쳐준 적 없는 형과 누나가 야속하고 미웠다고 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형편이 어려워 1년을 쉬게 되면서 혼자 산에 올라 나물을 캐 고, 나무를 베어 장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광교산에 수십, 수백 번 오르내리 며 산을 걷고 또 걷던 어린 시절.

아버지와 형은 중학교는 가지도 말라고 으름장을 놓으셨다고 했다. 가난은 어린 선생의 가슴 속의 상처가 됐다. 공부를 꽤나 잘 했던 선생은 출근 때마다 집에 들러 공부시키라는 담임선생님이 조력자의 역할을 해주셨고, 그 후로 중학교에 진학하여 71년에는 서울교육대학에 입학하게 됐다.

첫 발령을 받고 여주농고와 수원농고를 오가며 근무를 하던 중 이용하던 수여선 을 가로지르는 철길을 따라 ‘걷기’를 시작했다. 그 후 윤필영선생의 걷기 인생은 시작되었다. 골목어귀에서 산맥까지, 그가 평생 걸어 온 거리는 나로서는 가늠 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길고 다양하다.

그중에서 수여선은 조금 더 특별한 기억이 담긴 길이다.

“부모님의 고향이 여주에요. 할머니댁이 여주였어요. 어느 날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랑 함께 기차를 타러 갔는데, 기차가 벌써 가버린 거야. 미군차를 얻어 타고, 용인 가서 또 버스를 타고 밤늦게 도착했는데, 얼마나 힘이 드는지 기차가 좋았구나 싶더라고.”

부모님의 고향이자 우연히 발령받은 여주농업고등학교가 있던 여주. 수원에 살 고 있던 그에게 수여선은 반드시 이용해야만 하는 교통수단의 하나였다. 하지만 느리고 느리던 기차가 원망스럽던 때도 있었다.

“어머니 임종도 못 봤어요. 너무 멀고, 여주에서 수원까지 기차를 타고 가는데 너무 느려. 내려서 버스를 갈아타고 가는데, 그 사이에 어머님이 돌아가신 거죠.”

1930년 일본인이 운영하던 조선경동철도주식회사는 수원에서 이천, 이천에서 여주 구간을 잇는 수여선을 운영하게 된다. 학생들의 통학기차로, 장사꾼들의 교통수단으로 애용되던 기차였지만 수여선 구간은 본래 승객보다는 화물을 실 어 나르던 기차였다. 또한 수여선 구간은 전국 제일로 치는 여주, 이천 쌀을 일 본 본토로 수송하려는 계획으로 개통되었고, 해방 때까지 내륙에서 생산되는 각 종 농산물의 수탈이 계속되었다고 했다.

“여주와 수원 역에 커다란 창고가 있었는데, 벼와 쌀이 가득 채워졌던 걸로 기억해요. 작은 시골역사 앞에 그런 큰 창고가 있을 이유가 있었겠어요? 다 수탈을 목적으로 한 거지. 향수로 기억할 게 아니에요.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니까요.”

어떤 시선과 생각으로 시대를 사느냐는 때로 매우 중요한 이데올로기를 갖게 한 다. 1900년대를 사는 한 지식인으로서 아픈 역사를 눈여겨보았던 것은 아닐까. 수여선은 윤필영 선생의 삶과 맞물려 있다. 단지 교통수단만의 의미가 아니다. 그가 살아왔던 시간 속에서 사랑했던 사람들과 함께 했던 추억의 장소였다. 그 래서 특별하다.

“학교를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누구누구인지 이름을 다 외웠어요. 서로 다 알고. 안보이면 안부를 묻고, 상급생이 됐네, 졸업했네 하면서 소식도 전해 듣고 했지요. 가족 같았어요. 학생들은 대부분 표도 안내고 탔어요.몰래 타서 다음정류장에서 표 검사하러 들어오면 옆 칸으로 도망가고. 표내고 타면 학생들 사이에서는 ‘쪼다’라고 불렀을 정도래요. 그 표 살 돈도 아깝고 어려웠다는 거죠.”

“창문이 깨진 기차를 그냥 운영하는데,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겨울에는 춥고, 비가 오면 두꺼운 신문지로 막아도 비가 줄줄 새고, 캄캄한 터널을 지날 때면 죄다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숨도 못 쉬었어요. 먼지가 들어오니까. 아기를 데리고 타면 곤혹이지. 터널을 지나오면서는 불빛도 없고 아무도 안보이니까 ‘야 누구 거기 살아있니?’라며 농담도 하고...”

“아버지와 기차를 타는 일은 고역이었어요. 몇 시간이나 일찍 나가 기다려야 하고, 먹을 것을 주나, 무슨 대화를 하나……. 아버지랑 멀리 떨어져서 혼자 책만 보던 기억밖에 없어요. 아버지는 하루 종일 나가서 일만 하시고 들어오시면 약주하시고 그게 다였거든. 한번은 아버지 술병에 몰래 물을 가득 담아서 갖다놨는데 그걸 드시고는 처음으로 웃으시는 걸 봤어요.”

짧은 에피소드 안에 선생의 복잡한 감정이 느껴진다. 고맙기보단 느리고 불편했 던 기차 수여선.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을 오롯이 드러냈던 기차 안의 풍경. 그리 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와의 어색한 관계. 그런 시간을 지나고 1972년 수여선은 폐선되었다. 느릿느릿이던 기차가 사라진 것처럼 윤필영 선생의 삶도 빠르게 변화했다. 교사로 발령받기 한 해 전인 1978년 결혼을 하고 1남 2녀를 낳았다. 1999년 두 번째 여주농고발령을 받고 6년간 근무를 하면서 걷기 여행은 시작되었다. 개인적으로 우연한 기회가 생겨 오랜 시간동안 처음으로 긴 구간을 걷기 시작했다 는 선생에게 수여선과 수인선의 길을 걸으면서 각 지역의 문화를 느끼고 탐방하 는 일은 무엇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그 후 한강이 시작되는 태백 검용소에서 김 포까지 540km를 한 달에 한 번 2박 3일씩 나눠서 걸었다. 1년에 걸쳐 걷고 탐 방한 태백산맥은 우리나라의 아름다움을 절실히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서쪽에 위치한 인천, 시흥, 안산, 수원, 오산, 평택, 천안 등 아산만을 중심 으로 한 해안평야와의 경계를 이룬 산줄기인 한남정맥을 걷고 섬진강과 낙동강, 휴전선 걷기, 동해와 서해 걷기 등등 테마걷기 여행을 쭉 이어오셨다.

“걷다보면 우리나라 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그런데 걷다보니 한남정맥도 끊어진 구간이 많고, 개발이 돼서 아쉬운 곳이 많아요. 이런 것들을 잃어버리는 게 아깝고 억울해서 글로 남기고 기록도 하게 됐죠. 수여선도 마찬가지구요. 어느 날 차를 타고 가다가 기차가 지나던 구간을 지나치는데 많이 변했더라고요. 그래서 기억이 더 사라지기 전에 글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하고 글을 썼죠.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랄까, 지금 지나가버리면 다시 못 찾을 것들에 대한 향수 말예요.”

바쁘게 살라고만 하는 세상, 새것이 좋다고만 하는 세상에서 낡은 것을 기록하 고 기억하는 일은 든든한 문화유산이 될 것이다. 그는 정맥을 따라 걸으며 시대를 관통했다. 스쳐 지나간 많은 순간들 속에서 그 는 삶의 주체가 되었고, 그 삶은 지금 그가 살아가야하는 이유로 남았다. 오늘, 그는 어딘가로 걷기 위해 다시 길을 나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