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여선(水驪線) 협궤(挾軌)열차를 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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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흐름은 속도가 아니다. 화면의 전환이다. 그 옛날 여주를 가기 위해 증기 기관차를 타려고 역사 한쪽에 쭈그리고 기다리던 곳은 거대한 콘크리트 기둥에 떠받쳐진 백화점 건물이 그늘을 만들고 있다. 나는 아직도 그 그늘 속에서 기차 가 출발하는 시간을 기관차의 김빠지는 모양으로 짐작하고 있다. 수원 역사(驛 舍)를 겸한 백화점의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의 무게와 천안행 전철에 밀려오는 차가운 겨울바람을 느끼며 옛 수여선의 시간 속에서 깨어난다.

지금의 수원역은 AK플라자에서 역사를 겸해서 백화점을 지어 운영하고 있다. 처음에는 전국에 몇 안 되는 기와로 된 역사였으나 한국전쟁으로 파손되고 그 후 콘크리트 건물로 지어 운영해오다 지금의 새 역사를 갖게 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KTX가 다니지는 않지만(일부 노선은 운행) 천안까지 이어지는 전철 과 경부, 호남, 장항선의 많은 기차통행을 소화해내고 있는 바쁜 역이다. 도대 체 얼마나 장사가 잘되기에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공사하기 어려운 이곳에 역을 짓고 백화점을, 극장을, 주차장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나 궁금하기 짝이 없다.

수원역은 1905년 일제의 영향력이 강해지기 시작할 때 경부선의 한 역으로 역 할이 시작되었고, 수여선으로는 1930년 12월에 업무를 시작하였다. 이 업무를 맡은 회사가 조선경동철도다. 조선경동철도는 경기도 남부 오지와 경부선을 잇 는 교통로를 개척하고 오지의 산업과 경제개발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국철경부 선수원역에서 여주에 이르는 철도면허를 취득하였으며, 그 이후 수원에서 인천 항에 이르는 수인선을 개통시켜 해륙교통로를 확립하였다. 조선경동철도는 소 화 17년 11월 1일(1942년) 그 철도 전체를 조선철도에 양도하여 조선철도경동선 이 되었다. 그 후 종전까지 사설철도로 남아있던 협궤철도다. 해방 후는 국유화 되었지만, 설비는 옛 그대로인 상태로 막대한 적자를 내는 지방선이었기 때문 에, 1972년 3월 31일자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수여선이 이천까지 53.1㎞만 개통이 되었고, 여주까지는 일 년 뒤인 1931년 12월에 전 구간 73.4㎞가 개통되었다. 그리하여 전국 제일로 치는 여주, 이천쌀을 일본 본토로 수송하려는 계획이 완성되었고 해방 때까지 내륙에 서 생산되는 각종 농산물의 수탈은 계속되었다.

자, 이제 수원역을 출발하여 여주까지 추억의 기차여행을 즐겨보자. 이 기차는 1930년 12월 1일 수원역을 출발하였다.

수원역에서 용인역(24.1㎞)

경부선 수원역 밖 왼쪽 구석을 출발한 증기기관차는 남쪽으로 300~400m를 내 려가다 지금 오목천동 방향으로 통하는 평동지하도를 지나서 동남쪽으로 방향 을 바꾸어 길을 건넌다. 길을 건너자마자 수인선과 길을 달리하여 동쪽으로 내 달려 비로소 수여선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수원역 밖에서 출발하게 된 이유 는 해방 전까지 수여선이 사설철도였기 때문이다.) 수여선과 수인선이 갈라지는 세류1동 세류 어린이 놀이터 앞은 일제 때 철도의 종점이었다. 옛날 증기기관차는 객차나 화물차를 뒤에 달고 운행을 하여야만 하 였기에 다시 온 곳으로 향하려면 기관차가 앞으로 가야만 했고 이곳이 바로 기 차가 도착한 후 전, 후진을 반복하여 기차의 머리를 돌리기 위해 삼각형 모양으 로 철로를 놓았는데 돌로 둑을 높게 쌓고 그 위에 삼각형 모양으로 철로를 놓아 서 이를 ‘삼각선’이라 불렀고 그래서 지금 이곳의 도로 이름을 ‘삼각길’이라고 부 른다. 그리고 철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둑을 ‘데불뚝’이라고 하였다. 이 삼각선은 수여선 방향으로 ‘가는골길’과 수인선 방향으로 ‘수인2길’그리고 기 차를 돌릴 수 있도록 두 선을 연결한 곳이 ‘삼각2길’이다. ‘가는골길’과 ‘삼각2길’ 은 지금 보아도 옛 기찻길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옛날 기찻길의 폭과 경사를 그 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수인2길’은 ‘수인선 세류공원’으로 조성되어 협궤의 실제 철도를 일부 설치하고 이어서 보도블록으로 철길의 모양을 디자인하여 옛길에 조성하였다. 분지점에서 가는골길로 들어서면 완만하게 좌회전을 한다. 동립말길과 세류시 장길 사이에서 수인선과 연결되는 삼각선으로 합선하여 북동쪽을 향하여 내달 리다가 세계로에 앞이 막힌다. 증기기관차는 8차선 도로의 신호등을 여유 있게 기다리다 검은 강을 헤엄치듯 건너 윗버드내길로 들어선다. 길은 매교다리에서 콘크리트 덮개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터널 속 어딘가 남아 있을 옛날 화성역 기차다리 교각을 휘감고 있을 것이다.

증기기관차는 이내 다리 아닌 도로를 건너 화성역을 향한다. 길을 건너면서 복 개된 개울 건너 2시 방향으로 기찻길의 폭으로 남겨진 도로가 공구상 사이로 이 어진다. 그 방향으로 수원천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놓였던 그 옛날의 기차다리는 하루에 네 번 다니는 한가로운 다리였기에 이 동네 사람들이 개울을 건너는 데 이용하였다. 어른들은 기차가 지날 무렵이면 이 철교를 건너지 않았지만 아이들 은 역무원이 아무리 말려도, 기차가 저쪽에서 다가와도 그냥 철교를 건넜다. 건 너는 도중에 철로 사이로 내려서서 다리 밑 모래사장으로 뛰어내리는 묘미를 즐 기기도 하였다. 기차에서 내린 어른들 중에 일부는 역무원을 피해 이 철교로 건 너 무임승차의 벌금을 위험으로 피하기도 하였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기차를 탄다. 일정하게 들리던 레일의 마찰음이 어느덧 철교를 지나 퍼지는 소리로 바뀌면서 마찰음의 간격이 느려진다. 화성역에 들어 서고 있음이다. 벌써 플랫폼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기 위한 몸동작이 시 작되고 기차가 서기 전에 손잡이를 잡고 오르는 남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화성역의 본 이름은 ‘본수원역’이었다. 이것이 1948년 1월에 수원화성 옆에 있었 고, 그 근처 화성시장이라는 큰 시장이 있어 이름을 화성역으로 바꾸었다. 복개된 도로의 횡단보도를 다리로 건너 수여선길로 들어서면 좁은 길이 이어지 고 인계동사무소를 우측에 두고 몇 걸음을 내디디면 화성역이다. 지금의 2002 아울렛이 들어선 곳이 화성역사(驛舍) 자리다. 2002아울렛 앞 주차건물 자리는 화성역 앞 공터로 가물가물하게 기억된다. 수원역에서 거의 텅 빈 채로 떠나 온 기차가 화성역에서는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빽빽하다. 수여선의 주요 손님은 주로 화성역을 이용하였다.

얼마 달려오지도 못했으면서 사람들을 많이 태운다는 이유로 화성역에서 한참 을 쉬던 기차는 사람과 짐의 무게만큼이나 힘겨워 하며 늦은 출발을 한다. 이게 정녕 기차냐고 따지려다 매캐한 연기에 포기하고 멀리 걸어가는 사람과 속도를 맞추다보면 그래도 언덕을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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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을 낮추느냐고 깎았기에 양쪽이 둔덕을 이루고 좁은 골목을 지나듯 언덕을 오르면 오른쪽으로 수원공고가 자리하고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이다. 그러나 기 찻길은 이내 자동차로 홍수 진 국도에 멈칫거리고 거대한 콘크리트 고가도로에 멈출 수밖에 없다. 멈춘 것으로 그저 그만이다. 길 건너 빌딩은 옛 기찻길의 흔 적을 아예 없애버렸다.

도시의 콘크리트 속에서 길을 잃은 수여선은 동수원병원을 지나 아주대를 멀리 왼쪽으로 두고 원천중학교 근처에서 조그만 흔적을 보인다. 옛 철길의 폭 만큼 의 도로와 ‘원천역말길’이라는 이름으로 원천역터를 알려준다. 1969년 4월 10일 승객의 격감으로 역무원이 없는 간이역으로 격하되었다. 법원 앞을 지난 수여선 은 광교신도시 속으로 사라져 아예 흔적도 없다. 순전히 농사용으로 축조된 원 천 저수지는 70년대부터 유원지가 되더니 이제는 아파트단지 안에 광교호수공 원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하였다. 원천저수지를 앞에서 지나친 수여선은 방향 을 크게 틀어 동북쪽으로 향하여 덕곡역을 향한다. 원천역에서 몇 사람을 태우고 또 다른 개발지역인 용인 흥덕지구 근처의 덕곡역 에서 한두 사람 더 태운 후 신갈역을 향한다. 덕곡역은 흥덕 택지지구 일대 한국 아델리움아파트 인근에 위치했다. 이 역도 간이역으로 운영되다가 폐지되었다. 덕곡역을 출발한 기차는 약 1㎞를 가면 야산이지만 협궤열차가 넘기에는 힘든 고개가 가로 막는다. 첫 번째 터널인 덕곡터널이다. 지금은 골프장으로 탈바꿈 한 그 곳에 기찻길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메주고개 터널보 다는 짧은 길이로 기억되는 덕곡터널을 지나 지금의 경부고속도로를 건넌다.

용인이 군(郡)이던 시절 구갈리에 상대적으로 신갈리라 불리던 시골 마을은 교 통의 요충지가 되었다. 그러나 신갈역은 구갈리에 위치했다. 한성아파트 2차 진 입로 근처로 여겨진다. 경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 용인고속도로 등 주요 도로가 지나는 곳이고, 신갈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것 중에 인터체인지 이름이 ‘왜 수원인터체인지이냐, 신갈인터체인지라고 불러야지’라고 항의가 많은 곳이다. 그래서 이름이 바뀌었다. ‘수원·신갈 인터체인지로’. 용인은 신갈에 민속촌이 있어 외국관광객이 많이 오고 근처에도 도립박물관과 국악당과 같이 볼만한 시 설이 많다. 포곡면에는 에버랜드가 있는데 우리나라 학생 중에 이곳을 와보지 않은 학생은 아마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휴일이면 외국인 노동자들의 관광 지로도 유명한 곳이 되었다. 이런 곳을 수여선은 지나갔다. 어정삼거리에서 젊은 사람에게 물었다. “옛날 어정역 자리가 어디인지 아느냐?” 대답은 현재 용인경전철의 어정역을 턱으로 가리키며 알려주었다. 수여선이라 는 이름조차도 모른다. 불과 40여 년이 흘렀을 뿐인데. 전형적인 농촌이던 용인 이 지금은 거의 백만에 가까운 인구를 갖고 있는 관광도시가 됐다. 이 역과 삼가 역 사이에 ‘메주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에 수여선 두 개의 터널 중 하나인 멱조 현 터널이 있었다.

용인은 너무 이질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도시다. 토박이들이 많이 살 고 있는 처인구, 거의 전부가 외지 사람들인 수지구, 일부 지역에만 토박이가 살 고 있는 기흥구의 행정조직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용인시(龍仁市)는 본래 용구 현(龍駒縣)과 처인현(處仁縣)을 합치고 용구(龍駒)에서 용(龍)자와 처인(處仁)의 인(仁) 자가 합쳐 용인현(龍仁縣)이라고 칭하다가 후에 양지군(陽智郡)을 합쳐 오늘의 용인시(龍仁市)가 되었다.

신갈 구녹십자약품 옆에 신설되는 용인의 경전철 시발역은 옛 수여선과 비슷하 게 용인시내까지 노선을 같이한다. 신갈을 떠난 기차는 수원CC골프장을 뒤로하 고 강남대학교를 지나 어정역을 향하여 방향을 북동쪽으로 바꾼다. 지금은 동백 지구로 이름지어진 어정삼거리에서 어정역을 경전철역으로 바꾸고는 이내 힘들게 메주고개를 향해 오른다. 왼쪽으로 높게 솟은 산이 용인의 주산인 석성산이 다. 메주고개는 석성산에서 내려선 능선이 용인정신병원 고개로 이어지는 한남 정맥구간이다. 숨이 턱에 차는 기적소리로 터널을 들어서면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려선다. 지금은 동백지구의 지역난방공사가 메주고개 북쪽에서 터널 의 흔적을 없앴고, 남쪽에서는 경기농산이라는 RPC(정미소)가 터널 위에 자리 하고 있다. 수여선 73.4㎞의 길다면 긴 노선 중에 유이한 터널이 있는 메주고개 는 경기도 안성 칠장산에서 시작하여 김포 문수산까지 이어지는(지금은 경인운 하로 그 맥이 끊겼다) 한남정맥의 용인구간 중 일부다. 즉 메주고개 북쪽 동백지 구에 내리는 빗물은 서해바다로 흘러가고 남쪽으로 내리는 빗물은 경안천으로 흘러 팔당호수에 합류하는 분수령(分水嶺) 역할을 하는 고개이다. 메주고개를 넘어서부터는 함부로 방뇨하면 한강의 수질을 오염시키는 법적문제가 발생되는 지역이다.

1972년 이후 터널이 폐쇄된 후 터널 깊숙한 곳은 새우젓으로 가득 찼다. 젓갈류 를 저장하는 데 가장 좋은 조건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공기의 흐름이 전혀 없고 빛조차 없는 어둠의 공간 그 자체다. 경기농산 정미소가 남쪽을 메우고 그 위에 자리하였고, 북쪽은 지역난방공사가 메우고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터널 위의 산은 개인 소유이고 터널 자체는 철도공사 소유라고 한다. 직접 남쪽 터널 입구를 메웠다는 경기농산 관계자의 얘기로는 터널을 10m 이상 메우고 공장을 지었다고 하니 터널이 얼마나 깊이 자리 잡은 지 알 수 있다. 남쪽 입구 저 멀리 도 경전철 고가도로와 신설도로가 건설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철길자 리와 터널 위로는 상수리와 소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을 뿐이다.

터널을 빠져나온 기차는 새 공기로 심호흡을 길게 하고 용인시내를 향해 왼쪽으 로 크게 돌아 아담한 모습을 기적과 함께 보인다. 신설되는 경전철 노선과 길을 같이한 수여선은 용인행정타운 입구에서 삼가역을 만난다. 용인역까지의 거리 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타고 내리는 손님은 별로 없는 간이역이다. 아마 지금 의 시가지 여건이라면 삼가역이 용인의 으뜸역이 되지 않을까 추측된다. 전국에 서 제일 크다는 행정타운 건물 바로 앞인데다가 용인대학의 정문이 바로 이웃해 있기 때문이다.

꼬마열차는 칸과 칸 사이에 통로가 없다. 내렸다 옮겨 타야 한다. 창문에는 쇠 창살 두 개가 가로대로 막혀 있다. 짐은 통로에 쌓아서 객차 안을 다니기가 어 렵다. 물론 다닐 이유도 별로 없다. 승무원이 표검사를 하기 위해 역에서 그 칸 으로 올라타면 꼼짝없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표검사를 받아야 한다. 이런 상 황을 교묘하게 잘 피하면 공짜로 기차를 타게 된다. 창문은 잘 닫아도 바람이 들이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더구나 창문이 깨진 것은 다른 것으로 틀어막아야 한다. 쏟아지는 빗줄기는 깨진 창문에 막아 놓은 포대종이를 적시고 객차 안으로 흘러 든다. 한 여름 장마에 기찻길 옆 개울은 넘칠 정도로 물이 불었고 흐르는 속도도 거칠다. 저 물은 양지에서 흘러나오는 양지천을 받아들여 경안천으로 이름하여 팔당호로 흘러가게 된다. 흠뻑 젖은 시커먼 기차는 볼품이 영 말이 아니다. 우산 도 없이 기차에서 내린 아낙네들이 차안에서 거들어주는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짐을 머리에 이고 황급히 역을 빠져나간다. 경안천의 남쪽을 달리는 수여선은 지금의 용인시장내 GS 슈퍼 자리인 용인역으 로 들어간다. 현 용인시 처인구 김랑장동 254-1이라는 주소를 갖고 있다. 용인 역에서는 제법 많은 사람이 내리고 타며, 많은 양의 짐이 부려지고 실어진다. 그 리고 정차시간도 화장실을 다녀올 정도로 여유롭다.

용인역에서 이천역(29㎞)

용인역을 출발한 기차는 경안천을 북쪽으로 흘려보내고 양지천 상류를 쫓아 역 류하기 시작한다. 용인시내 동쪽에 자리 잡은 마평동 신평마을에 간이역인 마평 역에서 한두 사람을 내리고 태운 후 기차는 양지천을 따라 북동방향으로 방향을 바꾸어 양지역을 향하게 된다. 1955년 9월에 간이역으로 영업하다가 폐지되었 다. 산모퉁이를 돌아 선 협궤열차는 북동방향으로 향하고 이내 양지 시내로 진 입하여 양지역에 도착한다. 지금은 철길의 폭만큼 남은 길옆으로 양지역 터가 다른 용도로 이용되고 있다. 이름도 어느 흔적도 없는 양지역 터는 나이 드신 어 르신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양지역을 출발한 기차는 추계천을 북쪽으로 끼고 한적하게 달리다보면 제일(霽 日)역이다. 1969년 간이역으로 격하된 이 역의 이름은 언뜻 으뜸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기 쉬우나 ‘날이 갠다’는 의미다. 즉 ‘비가 온 뒤 날이 개어 해가 나왔다’ 는 의미이다. 용인의 제일 동쪽 끝이다. 제일역을 떠나 방향을 약간 북쪽으로 틀면 왼쪽으로 양지면에서 제일 높은 금박 산이 보이고 그 밑을 지나 동쪽을 향하면 저만치 마장면 소재지가 나타난다. 마 장우체국 앞에 위치한 오천역은 유일하게 역사(驛舍)가 남아있는 곳이다. 얼마 동안 남아있을지 궁금할 뿐이다. 역사 자리에는 우거진 숲이 옛 정취를 그대로 느끼게 하고 한적한 마을역인 오천역을 떠나 복하천을 건너 논 가운데 나있는 철길을 곧장 달린다. 지금은 직선 도로를 개설하여 오천터널을 주로 이용하고 각평리를 돌아가는 차는 노선버스 정도가 다닌다. 각평리 구길을 왼쪽으로 두고 북향하는 기차는 새로 난 42번 도로에 잠시 헤매 다가 지금은 동네 개울 교각으로 역할을 대신한 철길의 흔적으로 자리를 찾아 표교역을 향한다. 이 역도 간이역으로 격하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멀리서 어렴풋이 기적소리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소리가 추계천 골을 따라 저쪽 에서 들려온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철길에 귀를 대본다. 울림이 오는지 안 오는지 가늠할 수 없다. 그러나 아지랑이 같은 연기가 조금씩 비추더니 이내 검은 기차가 소리를 조금 높여 표교역으로의 입성을 알린 다. 아이들은 얼른 철길 위에 대못을 올려놓는다. 기차가 다가올 때까지 떨어지 지 않으면 칼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뒤뚱대며 다가오는 기차의 진동에 못은 옆 으로 떨어지고 만다. 다행히 기차 바퀴에 깔리면 못이 납작해지지만 튀어 나가 기가 쉬어 아주 위험한 장난이다. 서서히 기차가 멈추고 몇 사람이 내린다. 아쉽 게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넓은 공터를 물류센터로 이용하는 표교역을 떠나면 놀부집이라는 음식점 앞에 서 42번 도로를 횡단하게 되고 넓게 포장한 공터에 한가롭게 순대국집이 옛 철 길 위에 놓여있다. 중부고속도로를 가로지른 수여선은 2008년 1월 8일 유산리 의 냉동창고 화재현장을 오른쪽에 두고 유산역을 향한다. 아직도 불기운이 남 아있는 듯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손을 못 대고 있는 이곳은 40명의 혼이 구천을 헤매고 있는 곳이다. 기찻길의 흔적은 주유소, 간이건물, 주택 아래 묻혀있고, 이천을 우회하는 도로 에서 갈 길을 못 찾다가 북쪽으로 방향을 알린다. 유산역 터는 달려라 주유소가 자리하고 있지만 기차는 그렇게 빨리 달릴 줄 모른다. 유산역을 떠나면 율현리 를 지나 이천 시내 진입 전 수원사거리까지 직선길이다. 은근한 비탈길을 서서 히 달리면 멀리 아이들이 손을 흔든다. 그러나 열차 안에서 누구하나 같이 흔들 어주는 이가 없다. 졸기에 바쁠 뿐이다. 다만 출입문에 매달려 바람을 쐬고 있는 젊은이만이 가볍게 대꾸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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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걷이가 한창인 들녘은 노랗게 풍년의 색을 하고 있다. 논 한쪽에서는 장정 서너 사람이 둥글통을 힘차게 밟으며 타작에 신이 나 있다. 새참을 이고 온 아주 머니가 한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커다란 소쿠리를 내려놓고는 논두렁에 적당한 넓이로 펼쳐 놓고 식기 전에 들라고 재촉하는 소리가 한쪽 귀로 들리는 듯하다.

현재의 42번 국도를 왼쪽으로 두고 이천 시내를 향해 달리면 옛 철길의 폭 만큼 그대로 도심의 이면도로로 이용되고 있어 수여선 자리임을 알 수 있고, 더욱 철 도길이라는 명칭으로 도로 이름이 되어 있어 옛 이천역사(驛舍) 자리를 알려준 다. 이천시 창전동인 이곳은 아직도 많은 이천 사람들이 오거리 분수대광장을 역전광장이라 부른다. 이천은 1996년에 군(郡)에서 시(市)로 승격되었고 일부 지역에서 공업화가 이루 어졌지만 아직도 농촌의 티를 못 벗고 있다. 그러나 도자기 지역으로 유명하며 쌀밥집은 더 유명하다. 또 한 가지 유명했던 것은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유명한 정치깡패인 이정재의 고향이기도 하며 그 뿌리는 아직도 살아 있다. 용인을 떠나 이천까지의 70리 길은 옛 철길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고 또 아주 한적하고 여유로운 풍광의 시골 여행길이다.

이천역에서 여주역(20.3㎞)

지금은 이천이 여주보다 인구가 몇 배나 많은 도시가 되었지만 옛날에는 여주가 이천보다 여러 면에서 규모가 컸다. 오죽하면 명칭도 ‘여주 이천’이라고 여주를 먼저 불렀고, 법원과 검찰청이 수원지원 산하 여주지청이 있고 지금도 여주지청 에서 이천을 관할하고 있다.

여주와 이천 간에는 재미있는 일이 많다. 그 중에서도 가장 집요하게 다투는 것 은 어느 곳의 쌀이 우리나라 제일의 품질을 자랑하는가이다. 물론 여주 사람들 은 여주쌀을, 이천 사람들은 이천쌀을 으뜸으로 말한다. 여주쌀은 대왕님표이 고, 이천쌀은 임금님표로 대왕님이 높은지 임금님이 높은지 구분 지으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여주와 이천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면 그것은 그 리 얘깃거리가 되지 못한다. 여주와 이천을 경계 짓는 것은 산줄기도 아니요 강 줄기도 아니다. 길을 가다보면 이천이고 또 여주다. 논두렁 건너가면 이천논이 고 이쪽이 여주논이다. 벼품종도 같다. 그 땅이 그 땅이라는 말이다. 허기는 여 주 사람들끼리도 자기가 살고 있는 면(面)에서 생산되는 쌀이 최고라고 우기고, 이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여주와 이천에서 생산되는 쌀을 제일로 치는 것이 사실이다. 가격을 보면 알만하고 또한 주변 시, 군에서 생산된 벼를 일 부 여주나 이천에 와서 도정을 하여 여주쌀, 이천쌀로 둔갑하여 판매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주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계신 부모님이 서울에 사는 자식에게 쌀을 부치면 내용물이 바뀌어 전달된 적이 있었을 만큼 여주나 이천에서 생산된 쌀은 인기가 좋다. 이쪽 쌀로 밥을 하면 밥에 기름이 자르르 흐른다고 표현한다.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은 아직도 여주와 이천을 구분하지 않고 있다. 그저 한 고 향 사람인 것이다.

이천역에서는 객차 안의 승객이 반뿐이 남지 않았다. 이천역을 출발한 기차는 한전 뒷길의 이면도로를 벗어나면 밭으로 막힌다. 밭 한가운데는 옛 수여선 철 길을 알려주려는 듯 태극기가 꽂혀 있어 이채롭다. 쭉 뻗은 옛 철로 위로는 기차 가 아닌 폐차가 길을 따라 늘어서 있고 새로 난 높은 4차선 도로에 막혔다. 막힌 도로를 지나면 옛 철길 한 가운데를 막고 보리밥을 팔고 있다. 달리는 기차를 세 워 보리밥 장사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방향을 동쪽으로 틀면서 직진하다 보면 길 양쪽으로 그 옛날 철길 가장자리를 보호하고 있던 쪽제비싸리가 그때 그 나무인양 우거져 있고, 찔레가 초록잎에 대비되도록 열매에 색을 진하게 하고 있다. 붉나무가 제풀에 붉어져 가을이 이 미 시작되었음을 진하게 알려준다. 한내초등학교 담을 끼고 지나면 갈산동 마을 회관에서 복하3교까지 옛길의 흔적이 그 폭 만큼 수크령으로 덮여 있다. 4차선 도로의 다리로 새로 건설된 복하3교는 옛 철교의 흔적을 말끔하게 없앴다. 복하 천은 여주군 흥천면에서 남한강에 합류된다. 다리를 건너면 무촌역 자리다. 이 천시 부발읍 무촌리다. 지금은 진우아파트가 들어선 곳이다. 부발에서 북쪽으로 치우쳐 있는 이곳은 사거리가 되어 42번 도로 위와 고가도로가 이어져 있다. 고 가도로를 지나 이천종합운동장을 왼쪽으로 두고 남쪽으로 산길, 밭길을 오리쯤 달리면 죽당역 자리다. 부발읍 죽당리에 위치한 이 역은 임시승강장으로 이용되 었다. 부발농협 RPC가 자리 잡고 있는 이곳에서는 방향을 거의 정동방향으로 바꾼다. 죽당역에서 용은리까지는 밭 가운데로 철길의 폭 만큼 비포장도로로 이용되고 있어 침목만 없지 철길임을 확인할 수 있다. 높낮이가 별로 없는 평지 밭 가운데 를 지나는 기찻길은 왼쪽으로 KBS 여주송신소를 두고 양화천을 2차선 도로가 된 용은교로 건넌다. 바로 앞이 매류역이다. 아직도 매류역터 앞에는 역전슈퍼 가 있다. 옛날 기차가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도 담배와 잡화를 팔고 있다. 이곳이 옛 수여선이 있던 곳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노력을 동네에서 볼 수 있다. 역전 슈퍼는 역사(歷史)가 있는 가게다. 아마 가게 안에는 40년은 된 막소주가 한쪽 구석에 놓여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차는 멀리 보이는 북성산 이외에는 산이라고 없는 들판을 가로질러 달리고 중 부내륙고속도로의 양평 방향 고가도로를 위로 들어 올리고 광대역터로 방향을 튼다. 간이역으로 이용되었던 역이라 그런지 흔적조차 없다. 논두렁의 흙색이 쌓인 눈 사이로 이웃집 논을 경계하고 있고 일찌감치 싹튼 보리가 눈 사이로 비 집고 올라와 흰색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멀리 산 밑 눈이 쌓여 둥근 지붕의 굴 뚝에서는 눈과 잘 구분되지 않는 연기가 피어올라 저녁 시간대를 기우는 해보다 먼저 알려준다.

연라리까지 새로 난 길은 옛 철길을 왼쪽 발아래에 두고 계속 달린다. 거의 일직 선으로 달려간 신작로는 333번 도로와 만나 방향을 북쪽으로 급하게 튼다. 또 하나의 간이역이던 연라리역은 도로로 편입되었고 주막터였던 곳은 슬레이트 지붕의 농가가 자리하고 있다. 다만 철길의 흔적으로 말뚝이 박혀 있다. 연라리 역을 지나면 조그만 공장이 철길을 가로막고 있지만 이어서 논 가운데로 콘크리 트로 포장된 옛 철길 자리가 선명하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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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여주읍내로 들어서자 소양천이 가로막는다. 철교였다고 믿기 어려울 정 도로 좁디 좁은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으로 경찰서를 끼고 우회전을 하고 37번 도로를 건너 여주역으로 들어간다. 여주군민회관 언저리 일대가 여주역터다.
옛날 경기도에서 가장 시골이라고 하면 ‘양가포’를 얘기했다. 즉 양평, 가평, 포 천의 세 곳을 말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여주가 경기도에서 가장 도시화가 안 된 곳 중에 하나다. 남한강을 끼고 있어서 더욱 그렇지만 경기도에 제일 동쪽 끝에 위치해서 그럴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장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농사곳 으로 더욱 유명하게 만드는 것이 여주쌀, 여주밤고구마, 여주땅콩 이외에 요즈 음은 인삼이 유명해졌다. 아쉽게도 지금 여주는 시로 승격되었다. 시로 승격시 키기 위한 웃지 못 할 행정조치들이 이루어진 덕이다. 누구를 위한 승격인가?
여주에는 가볼만한 곳이 많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강가에 자리한 신륵사, 신라 3대 사찰의 하나인 고달사지, 세종대왕릉, 명성황후 생가 등이 있다.

요즈음은 새로운 관광지로 ‘보’를 내세운다. 옛 이포나루 근처에 ‘이포보’가 만들 어졌고 여기서부터 흐르기를 멈춘 강물은 대신면과 능서면을 잇는 ‘여주보’까지 호수를 이룬다. 여주보에서 멈춘 강물은 여주시내와 신륵사를 지나 멀리 강천 에서 보를 만난다. 이를 ‘강천보’라 한다. 여기서부터 남한강, 섬강, 청미천의 세 물이 만나는 삼합리까지 호수로 이어진다. 그야말로 여주는 춘천처럼 호반의 도 시가 되었다.

수원에서 여주까지는 역이 21개가 있었다. 수원-화성-원천-덕곡-신갈-어정 -삼가-용인-마평-양지-제일-오천-표 교-유산-이천-무촌-죽당-매류-광대리-연라리-여주. 수원에서 여주까지 지도상에서 직선거리는 56.5㎞이다. 73.4㎞를 필요한 곳을 찾아 철도를 부설하고 역을 만든 이유는 그곳들이 전부 각종 농산물, 특히 쌀의 주산지이기 때문이다. 일제 수탈의 역사적 흔적들인 곳이다.
그 수탈의 시간을 지나 총 73.4㎞를 달려 여주역에 도착한 오늘은 1972년 3월 31일이다.

에필로그

수여선 개통 당시 수원 - 여주 간의 운임은 쌀 두말 반의 값으로 비싸서 보통사 람들이 이용하기에는 벅찼기에 해방 이후 서민들에게 요금을 인하하고, 운행 횟 수도 늘려 용인, 이천, 여주 등 중부내륙 사람들이 철도를 중요 교통 수단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수여선과 수인선은 하루 4번을 운행하였는데 각 지역에서 생산된 물품을 다른 지역의 장날(용인과 여주는 5일과 10일, 이천은 2일과 7일, 수원은 4일과 9일) 팔기 위해 인천에서부터 여주까지 두 협궤열차를 번갈아 이용하는 장꾼들이 많 았고, 수여선은 손님보다는 오히려 쌀을 운반하는 양이 더 많았다. 또한 용인 등 지에서 수원으로 통학하는 통학생들이 열차의 주요 고객이 되었다. 증기기관차 의 크지 않은 기적 소리는 수여선 주변 농촌의 시계가 되었으나 연발착이 다반 사이기 때문에 정확성을 크게 믿지는 않았다. 장을 마친 술 취한 아저씨는 기차 에 오를 때 신발을 벗어 들고 타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덩치도 작고, 레일의 폭도 좁고, 매단 칸수도 작아 꼬마열차라 불리었던 협궤 열 차는 일반 철도 표준궤도의 폭이 1,485mm인데 비하여 옛 수여선과 수인선 협 궤열차의 폭은 762mm로 표준궤도의 절반 밖에 안 되었다. 뿐만 아니라 좌석수 50석에 정원은 90명인 객차는 폭이 2.15m로 객차 좌석의 배치가 지금의 지하 철처럼 길이로 마주보게 되어 있어 다리가 긴 사람은 무릎이 마주 닿을 정도로 좁아 통로를 비집고 다녀야 했다. 객차의 폭이 좁은 관계로 제법 속도를 내서 달리기라도 하면 뒤뚱거리는 정도가 심해 옆 사람과 부딪치는 일은 보통이었고 심지어 1991년 6월에는 덤프트럭과 열차가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는데 덤프트럭은 멀쩡하고 열차가 탈선하여 36명이 다치는 일도 있었다. 더욱 가관인 것은 객차 안에 난방시설이 없었기 때 문에 난로를 피우고 열차가 운행되었는데 용인 메주고개(멱조현)를 빠르게 내려 가던 열차가 균형을 잃고 전복되어 화재가 발생하여 여러 명이 불에 타 죽었고 많은 화상자가 발생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도 발생하였다.

메주고개 터널을 지날 때는 증기기관차의 연기를 막느라 객차의 창문을 닫았지 만 벌어진 문틈과 깨진 창으로 들어오는 연기에 입과 코를 막고도 한참을 숨을 참으며 터널을 통과하였고 터널을 빠져나온 뒤의 차안은 남은 연기를 빼내느라 추워도 창문을 전부 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고개를 오를 때 기차가 힘에 부쳐 오르지 못하면 승객들은 기차에서 내려 걷기도 하고 젊은 남자들은 기차를 밀기 도 하였다. 더운 여름이면 창문을 들어 올려 열었지만 화물칸 같은 객차에는 창문의 수가 몇 안 되었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은 문손잡이를 잡고 머리를 바깥으로 내밀고 시원한 바람을 쐬며 달렸다. 그러나 출입문 손잡이는 세상에 가장 더러운 쇳덩 어리다. 지금 생각하면 어림도 없는 얘기지만 그 당시 기차의 화장실은 용변을 보면 곧 바로 철길 위로 떨어지게 되어 있고 달릴 때 용변을 보면 그것이 다 날 려 손잡이에 달라붙었던 것이다.

교통 여건이 어려웠던 그 시절은 기차통학을 하기 위하여 먼 거리를 역까지 걸 어 나와야 했다. 용인 구성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의 경우 10리 정도를 걸어 신갈 역까지 나와 기차를 타면 ‘역곡’, ‘원천’을 경유하여 ‘화성’까지 9.5㎞를 기차로 이 동한 후 내려서 수원의 중, 고등학교까지 또 10리 정도를 걸어서 다니는 기이한 통학코스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여주에서부터 먼 거리를 달려오는 관계로 제 시간에 도착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어 통학생들에게는 지각면죄부의 특혜를 주 는 학교가 대부분이었다. 일부 학생들은 기차비를 내지 않으려고 기차가 서서히 달리는 고개에서 올라타거나 내리기도 하였지만 직원에 의해 크게 단속받지는 않았다. 많은 승객들은 학생들이 올라타기 쉽도록 손을 잡아주는 등 도와주는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기차를 이용하는 승객들은 여러 이유로 아는 사람이 대부분이어서 어느 날 어떤 학생이 보이지 않으면 그 학생이 상급학교에 진학하였거나 졸업을 한 사실들로 얘기의 꽃을 피워 부러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객차 안에 장꾼들의 짐과 일 반 승객들의 짐으로 다니기가 어려울 정도였지만 그래도 수인선의 비린 냄새가 없어 불만은 적은 편이었다.

국민학교를 갓 입학했을 즈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로 기억한다.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화성역으로 어머니와 급히 기차시간에 맞추어 발걸음을 옮겼지 만 기차를 놓쳐 버스와 미군트럭을 얻어 타고 여주까지 간 적이 있었다. 그 후로 아버지와 여주 큰집에 갈 적에는 기차시간 두 세 시간 전에 가서 기다리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지금도 그때의 시간을 지루하게 기억하고 있다. 수여선을 운행하는 차량은 증기기관차와 디젤동차였는데, 수여선의 경우 증기 기관차는 4시간을 주행하고, 디젤동차는 2시간 30분 만에 주파하여 증기기관차 는 화물용으로, 디젤동차는 여객용으로 사용하였다. 수여선은 막대한 적자를 만회할 길이 없자 마지막 열차로 1972년 3월 31일 제일 끝 칸에 ‘주민여러분 안녕’이라는 현수막을 내달고 여주군민의 배웅을 받으며 수 원을 향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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