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의 수탈열차 수여·수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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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수탈에 악용된 수여선

“발전은 변화가 아니라 기억에 달려 있다. 과거를 기억할 수 없는 사람은 그것 을 반복하는 벌을 받는다.”미국의 철학자이면서 시인·평론가인 산타야나의 말 이다. 우리는 놀라울 만큼 발전했다. 하지만 과거에 대한 기억을 낭비라고 생각 한 탓에 채 1세기도 안 된 삶의 흔적조차 알 수 없는 ‘기억빈곤증’에 걸리고 말았 다. 다행인 것은 최근에 와서 민초의 민낯을 재조명·재해석하는 향토사 연구가 생동감 있게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같은 흐름에 일조가 될까 싶어 어느 덧 옛말이 되고만 수여선과 수인선에 얽힌 일화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는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선으로 구한말인 1899년 9월 18일 노량진과 제물포 구간의 개통식을 갖고 영업을 개시했다. 오늘날 철도청 이 9월 18일을 ‘철도의 날’로 제정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1905년 5월 28일 서울-초량(부산) 간을 잇는 경부선(444.5km)과 1906년 4월 3일 서울과 신의주 를 잇는 경의선이 완공됨으로써 조선반도를 남북으로 종관(縱貫)하는 철마가 질 주하기 시작했다. 두 철로의 길이를 합산하면 9412km로 당시의 조선 이수로는 235321였다. 철마의 등장은 지게와 우마차가 운송수단의 전부였던 우리로서는 경악을 금치 못할 신문명과의 첫 대면이었지만, 최단시일 안에 기간철도를 완공 한 일제로서는 식민지 강화를 촉진하는 초석을 깐만큼 입이 귀에 걸릴만큼 희희 낙락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73.4km의 수여선, 20개역 개통

이미 경인, 경부, 경의선 부설을 통해 철도에 자신감을 가진 조선총독부는 지선 (支線)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데, 이때 선택된 것이 경동철도주식회사(사장, 다니카죠지로, 田中常次郞)였다.

공사는 순조로웠다. 시발역과 종착역 간의 정거장은 수원-본수원(훗날 화성)- 원천-(덕곡)-신갈-어정-(삼가)-용인-(마평)-양지-제일-오천-(표교)-유 산-이천-(무촌)-(죽당)-매류-광대리-(신대, 연라리)-여주까지이며, ( ) 안 의 간이역을 포함하여 20개역이 넘었다. 73.4km의 수여선은 1931년 12월 1일 개통됐다. 철마를 처음 보는 농민들은 눈이 휘둥그레했지만 왜 철도가 깔린지는 그 뒤에야 알았다.

철도는 한 나라의 최대 이권으로 철도부설권과 운영권을 빼앗기는 것은 나그네 에게 안방을 내어 주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이었는데도 우리 정부는 두 손 놓고 구경하거나 눈 뜨고 코 벼가도 달리 대처하지 못했으니 절통할 노릇이었다. 워 낙 상주인구가 적은데다 교통수요조차 많지 않은 경기동부의 벽지 여주에 막대 한 자금을 투입해 철도를 부설한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경성(서울), 인천, 부산, 원산, 수원, 개성 등지로 집중되는 일본 이민자들을 내륙지방으로 분산시킴으로써 식민지 세포를 확장시켜 조선의 완전 장악을 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기남부지방에서 생산 되는 양질의 쌀과 잡곡을 일본으로 빼돌려 자국민의 식량난을 해소시키려는 자 원 수탈이었다. 특히 여주지방에서 생산되는 자채(紫採) 쌀은 그 맛과 풍미가 김포미와 함께 상 등미로 꼽힌 터라 입맛이 간사스러운 일본인들로서는 눈독을 들이지 않을 수 없 었을 것이다.

수여선이 개통된 지 1년만인 1932년 경동철도가 집계한 영업실적을 보면 여객 운임 28만 6265원, 화물운임 11만 2662원, 잡수입 3만 1547원으로 모두 합쳐 43만 461원에 달했다. 개업 1년만의 영업실적치곤 매우 양호했다. 그런데 여기 서 간과하지 말아야할 대목은 화물수입이 승객수입보다 4배 가까이 많았다는 점이다. 여주에서 나올 수 있는 화물이란 게 대체 무엇이었을까. 쌀과 잡곡 말고 는 나올 것이 없다. 수여선의 화물 수송량은 해마다 늘어났다. 이곳에서 반출된 식량은 수원을 거쳐 인천 또는 서울의 미두장(米豆場)으로 몰렸다. 미두장이란 현물 없이 곡물을 거래하는 오늘날의 선물시장이다. 수여선을 개통한 1931년부터 광복까지 14년 동안 수여선을 통해 일본으로 빼돌 린 식량의 양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수탈을 당한 농민들의 고통과 비분은 하늘 을 찌르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루 4편 운행, 연발착은 예삿일

수여선은 하루 4편 운행했다.
수원발 09시 50분, 여주착 12시 13분
수원발 13시 00분, 여주착 15시 23분
수원발 15시 30분, 여주착 18시 01분
수원발 19시 08분, 여주착 21시 43분

오전에 한 편, 오후가 3편인데 기관차 동력이 약한 터라 고갯길을 오를 때는 힘 에 겨웠고, 속력이 떨어지다보니 연발착은 다반사였다. 1932년 7월 29일자 동 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경동철도는 교통기관의 중대한 책임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지 2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시간 연착이 부절하다. 최초 어느 정도까지 시간의 연장이라든지 기타 불비한 점이 있는 것은 용혹무괴(容或無怪)나, 장구한 사안을 허비한 지금에는 유루(遺漏)의 탄(嘆)이 없을만치 제반설비도 정돈되었을 것이며, 규칙 엄수에도 완전무결하게 진행될 줄 믿는 바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상을 본다면 연발착은 물론 휴지(休止)하는 사례까지 있으니, 그 책임을 언제까지 감행할 것이냐.

이런 일도 있었다. 용인역의 화물계가 일반화물이 많다는 구실로 동아일보를 내 려 줄 수 없다며 그냥 가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리하여 동아일보가 1937 년 11월 5일자 신문에서 불만을 터트리는 기사를 싣기도 하였다. 하기야 신문 은 속보가 생명인데 용인역에서 내려줘야 할 신문을 여주까지 싣고 갔다가 수원 으로 돌아갈 때 던져주니, 신문이 아니라 구문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기반시 설이 취약한데다 운전기술마저 서툴다보니 사고도 잦았다. 1935년 12월 10일자 조선일보의 원문 기사이다.

이십일 오후령시 이십분에 경동철도에서 긔차가 전복되야 사람 네명이 중상을 입었다. 사고가 생긴곳은 경동철도 오정역에서 수원쪽으로 향하야 이백매돌 되는 곳으로 곡식을 실은 화물차에 긔관수 한음성 화부 윤광인 차장 오무영 등 세명이 타고 이날 오후령시 오분에 룡인역을 떠나 수원으로 가든중 전긔 장소에서 약 이십미돌 진행하야 전복되엿다. 그래서 승무원 전부 중상을 입엇다. 그 화물차는 긔관차 다음에 뚝껑업는 차 두대 그 다움에 뚝껑업는 차 한대 또그다음에는 뚝껑잇는 차 한대의 순서로 련결하야 벼삼백팔십일가마니와 현미백가마니를 싣고 가든 길이엇다. 원인은 아즉 알수업스며 전복된 장소에는 약이십미돌가량 철도침목이 부서저버리고 「레일」 접속된 부분이 떠러저버리고 그박게 「레일」이 활장가티 굽어저서 선로바그로 버서나 버렷다. 사고가난 것을 보고 구조하러갓든 홍석근이라는 사람도 중상을 입어서 부상자 네명은 전부 수원도립의원에 데려다가 치료중이다.

이 기사에서도 일제가 수여선을 통해 얼마나 많은 양의 벼와 현미를 실어 날랐 는지를 알 수 있다. 그 후 수여선은 1972년 3월 31일 운행을 마지막으로 역사 속 으로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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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자원 수탈철도 수인선

수원과 인천을 잇는 협궤철도 수인선은 1937년 3월 1일 개통됐다. 수여선이 수 려한 강산과 광활한 평야의 평화를 깨버린 소요였다면 수인선 개통은 천혜의 해 안 자원을 품은 경기서부의 갯벌과 바다 내음 그윽한 해촌을 단잠에서 깨운 난 리법석의 역사(役事)였다.

두 열차는 궤도가 좁은데다 기관차와 객·화물차의 겉과 구조가 동일해 쌍둥이 꼬마 열차라고 불리웠다. 수여선이 용인‧이천‧여주 지방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입 쌀을 일본으로 실어나르는 수송수단이었다면 수인선은 수원과 인천을 잇는 서 해안 갯벌에서 무진장으로 생산되는 천일염과 수산물을 일본으로 빼돌리는 중 계수송 역할을 했다.물론 수여선이 경기남부의 곡창지대에 근대화의 물꼬를 터주었듯이, 수인선도 경기서부 해안지대를 근대화시키는 데 일조를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여주지 방민과 달리 인천사람들의 수인선에 대한 시각은 그리 곱지 않았다. 이미 경인 선과 경부선의 개통을 경험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오히 려 인천상공인들은 수인선 부설이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나서기까 지 했다. 1936년 11월 26일자 조선상공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한 바 있다.

수인선 건설공사는 조만간에 착공, 1937년 4월경에 개통할 모양이나 동 철도는 과연 경제적으로서의 가치가 있을지 크게 의문시되고 있다. 오직 여주지방의 미곡을 인천으로 집화시킬 모양인데 물자 관계에서 약간의 기대가 있기는 하지만 승객의 증가는 속단하기 어려우므로 수지면의 성과 예상은 전혀 확실하지가 않은 상태이다. 이같은 불안 재료의 칵테일 탓으로 동사의 주식은 5월 불입의 것이 겨우 2원 70전이라고 하는 대참락을 보여 조선철도계의 최저치를 시현하기에 이르렀다.

수인선 반대론자들은 대안까지 내놓았다. 여주지방의 곡물 수송은 여주 선으로 수원으로 이동시킨 뒤 경부선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면서 경제적이라 고 지적하고, 승객 수요가 적은 수인선 부설은 국철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밝 혔다. 그러나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조선총독부가 소수 상공인들의 반대를 수 수방관할 리 없었다. 회유와 압력이 작동하자 반대 목소리는 언제 그랬더냐는 듯이 사라지고, 경철에 의한 공사는 본격화 되었다. 이미 수여선 건설의 경험이 있고, 6년 동안의 운행 경력에서 얻어낸 노하우는 난관부재의 동력이었다.

수원을 시발역으로 하여 어천, 야목, 사리, 일리, 고잔, 원곡, 군자, 달월, 소래, 남동, 송도, 용현, 종착역인 인천항역까지 14개 역과 소금과 수산물을 보관하는 창고와 부대시설을 짓기까지 불과 1년 2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한때의 반대, 반대에 대한 회유와 협박의 어두운 그림자도 옛말, 수인선 개통식은 요란했다. 조선총독부 고관을 비롯한 내외 귀빈과 수백명의 시민 축하객이 줄을 이었다. 당초의 우려와는 달리 수인선의 경영실적은 양호했다. 수여선을 통한 곡물량이 증가하고, 강원도지방에서 채벌한 원목까지 대량으로 반입되면서 인천항역 구 내에는 대형창고 짓기 공사가 계속되고, 창고 안에는 일본으로의 이출(移出‧수 출)을 기다리는 쌀과 소금이 차고 넘쳤다. 창고에 물자가 가득 차면 찰수록 우리 국민들의 먹거리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수인선은 오전과 오후 두 번씩 4번 왕복했는데 이와 별도로 수탈물자를 실어 나 르는 화물차 역시 4번 왕복 운행했기 때문에 총 8번을 왕복한 셈이다. 선로가 단선인터라 야목역에 먼저 도착한 열차가 기다렸다가 반대편 열차가 들어오면 비껴서 출발하게 되는데 이 기다리는 시간에 급수와 석탄을 공급 받다보니, 야 목역에는 다른 역에 없는 높다란 급수탑과 석탄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워 낙 기관차가 작은데다 성능도 좋은 편이 아니어서 연발착은 다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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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는 승객들이 차에서 내려 노자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한가로이 잡담을 나 누기도 하는데 그 모습이야말로 선진국 정거장에서는 볼 수도, 상상도 할 수 없 는 낙천적 화폭이나 다름이 없었다. 특히 아낙네들이 바다에서 건져 올린 생선 을 가득 담은 다라이를 머리에 이거나 품에 안고 객차에 오르기 때문에 차안은 비린내가 진동했지만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비린내 속에서 인 생의 애환과 민족의 아픔을 서로 어루만지는 듯해서 숙연하기까지 하였다.

일제가 이른바 대동아전쟁을 일으킨 1942년부터는 석탄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속도가 크게 떨어지고, 차내의 실내등까지 켜지 않아서 캄캄한 굴속과 다르지 않았지만 덜컹거리는 진동은 한층 정답게 느껴졌다. 이 꼬마열차도 1942년 11 월 경철의 운영권이 조선철도주식회사로 넘어가면서 국철로 바뀌었고, 그나마 1995년 12월 31일에는 적자 노선으로 찍혀 폐선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이제 와서 복선화 복구를 서두르고 있으니 세상을 내다 보는 안목이 정상인지 개탄을 금할 길이 없다. 필자는 수인선 폐선 직전인 1993 년 11월 28일 다음과 같은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수인선의 운명⟫
지금 수인선 꼬마 열차는 하루 세 번 왕복 운행하고 있다. 이 열차는 우선 재미있게 생겼다. 협궤열차이기 때문에 차체가 작고, 예전에 때던 석탄 대신 디젤기관차로 바뀐터라 석탄가루는 뒤집어쓰지 않게 되어 다행이지만 주행속도는 여전히 느리다. 1960년대만 해도 화물 곳간 차나 다름없었던 객차에 길다란 나무의자가 설치되니까 그런대로 참을만 하다. 이 열차가 천덕꾸러기가 된 것은 승객이 격감하면서 적자 노선이란 오명이 찍힌 뒤부터였다. 철도청으로서는 미운 오리 새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열차는 없애지 말아야 한다. 돈 버는 장사가 있으면 밑지는 장사도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흑자 노선에서 벌어다가 적자를 메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명물(名物)은 명물로 남겨 두어야 한다. 무엇이든 새 것만 좋아하다 보면 역사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철도청 관계자의 당나귀만한 귀에 한낱 벌레 소리만도 못한 필자의 충고가 들릴 리 만무하지만, 비록 일제의 잔재요 당장에는 적자노선이었다하더라도 수여선 과 수인선을 그대로 보전하였더라면 지금쯤은 돈벼락을 맞았을 것이다. 당부하거니와 송사리를 잡느라 대어를 놓치는 어리석음은 되풀이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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