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에도 기차가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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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서 여주를 오고가던 수려선(水驪線)열차! 41년 4개월간을 운행하면서 많은 문화와 문명을 실어다주었고, 이용인들 모두에게 향수와 낭만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수려선 열차의 개설동기와 열차에서 일어났던 재미있는 사연들을 2회에 걸쳐 상기해 본다.

1972년 4월 1일 여주역에서 수려선 열차 종별 운행식이 이뤄졌고, 고별을 마중 해준 윤기영 군수를 비롯하여 주민 철도관계자 등 60여 명의 배웅을 받은 기관 차 앞에는 원형화환을, 옆으로는 『여주야 잘 이거라』라는 현수막을 달고 힘찬 기 적소리를 남기고 떠나간 마지막 열차!….

석별을 알리는 기적소리가 역전 주변에 울려 퍼지고 주민들의 무관심과 아쉬움 으로 떠나보낸 수려선 열차가 벌써 40여 년이 되었다. 세월은 유수와 같다는 이 상철 옹은 신기한 개통식을 관람하고, 종별열차를 본 것이 감희로운 기억으로 남고 있다면서 당시를 회상했다. 또 언제나 다정 다감하게 기사 송고를 접수해주어 친근감으로 기억되는 역무 원 김영태 씨는 필자를 만나자 서민들의 유일한 교통 수단이던 수려선마저 폐 선되면 여주발전이 암담(暗澹)하다며 걱정해주던 역무원들의 소리가 아련히 기억된다.

1931년 12월 1일 개통하여 41년 4개월간을 운행하면서 신기한 열차로 호기심과 환영, 그리고 애정과 아쉬운 추억의 향수를 남기고 1972년 4월 1일 마지막 기적 소리를 끝으로 영원히 떠나간 수려선 열차는 “여주에도 기차가 다녔다는 풍문( 風聞)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수려선은 일정시대 경성철도(주)회사 사장 다가와죠지로(田川常治郞)와 전무 나 이도신지가 본사를 수원에 두고 여주, 이천의 쌀 등 토산물 운송과 해산물 반입 을 위해 사설로 73.3㎞에 협궤철도(挾軌鐵道)를 개설하고 협궤 열차를 개통하여 상업 전용 열차로 이용했다. 철로(鐵路)는 경부선 철로보다 가늘고 폭도 좁은데다 기관차와 객차, 화차도 작 아 경부선 열차를 보다 수려선 열차를 보면 장난감 열차를 보는 것 같았다. 당시 처음 볼 때만해도 신기한 열차였던 협궤 열차는 현재까지도 일본에서 운행하고 있다.

수려선 열차를 운행해온 경성철도(주)회사는 수로운항 도선권까지 갖고 배를 이 용하여 해산물과 소금, 석유 등 공산품을 수려선 열차로 반입해와 원주와 충주 까지 내왕하며 이를 팔고 그 지역의 토산물을 실어와 수려선 열차로 수송하는 등 상업 전용 열차로 이용했다. 8.15해방을 맞이한 수려선의 운행권은 철도청으로 귀속되어 지난 27년간 운행 했지만 적자 핑계만 대고 개선이 되지 않아 ‘개선 안 되는 수려선 열차, 연착 잦 고 차내는 악취’(경향신문 1969년 9월 22일자 보도)가 심하다는 기사가 수회나 보도되었다. 승객들의 호소로 인해 하루 10회를 운행하는 열차의 의자가 낡아 승객들의 옷을 찢기가 일수이고 운행 중 고장으로 연착이 잦고 차내는 악취가 풍기고 기관차 2 대가 고장으로 운행을 못해 화물 운송을 못하고 있다는 호소 기사가 각 신문에 자주 보도되었지만 개선은 외면됐다.

한편, 여주군민은 일본 제국시대부터 해방 후 노선 버스가 운행될 때까지 중앙 일간지 신문과 간행물 등을 수려선을 이용해 받아보는 편의를 받았다. 또한 신문기사 원고까지도 열차를 이용해 송고 편의를 받고, 본 필자도 운행이 중지될 때까지 기사 송고의 편의를 받았다. 이에 따라 수려선 열차는 여주, 이천 의 새로운 문화를 수송해준 문화 철도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70~80대들은 말한다. 시속 10~70㎞를 달리는 느림보 열차였지만 낭만이 있고 추억이 있었다며 개통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이상철, 황태흥 옹은 전한다. 우마차만이 수송되던 당시에 개통되면서 신기한 기차를 보기 위해 인근 충주, 음성지역 주민들이 몰려와 구경을 하고 돌아가서는 쇠 덩어리가 굴러 가드라는 등, 기차를 보고 감상하는 주민들의 얘기는 서로 달라 기차에 얽힌 그 사연도 가 지각색이었다.

41년 4개월간을 운행한 수려선 열차!! 많은 문화와 문명을 실어다주고 이용인 모두에게 아쉬운 향수와 낭만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수려선 열차의 아기자기한 사연과 그에 얽힌 사연들을 상기해보자.

수려선이 개통하던 1931년 12월 1일은 몹시 추웠다고 한다. 추운 날씨에도 역 전주변(현 홍문리 74번지일원)에는 50여 명의 주민들이 몰려와 신기한 열차에 도취되어 떠날 줄 모르고 열차가 떠나갈 때까지 지켜보았다고 이상철 옹은 전 한다. 열차 운행은 화물 수송에 주력하고 일반 승객 탑승에는 대책이 없어 승객들이 화물칸에 가마니를 깔고 승차해서는 냄새 때문에 추워도 문을 열어놓고 타고 다 녀야 했고 또는 지붕 없는 화물차에 조개탄 난로를 피우고 둘러앉아 잡담을 나 누며 타고 다니기도 했다. 일제시대에는 특별한 객차용 기동차(汽動車)를 운행하였는데 이용 요금이 일반 객차 요금의 10배가 넘는 요금이어서 서민들은 아예 탈 엄두를 못 내었다. 그러 한 연유로 이용승객이 없어 특별한 때에만 운행을 했던 열차를 일반인들은 신기 하게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수려선 열차는 유일한 교통 수단으로 그 인기도 대단했지만 특히 바다의 해산물 과 소금, 석유 등 공산품이 반입되어 문명의 혜택을 받으면서 한때 인기 또한 대 단했지만 이를 주변에 자랑으로 전할 때가 주민들은 더욱 신이 났다고 한다.

수려선 열차는 휴전 후 50, 60년대 젊은이들이 군에 징집되어갈 당시 태극마크 어깨띠를 두르고 동절기에 징집되어 갈 때 열차 안의 냄새 때문에 추워도 문을 닫지 못하였던 일, 부모와 떨어지는 이별의 아픔과 모진 그 추위의 고통이 지금 은 추억의 향수로 남았다.

시속 10㎞에서 70㎞를 달리는 느림보 열차! 선로가 조금 높은 선로에서는 승객 들을 내려서 걷게 했고 특히 용인의 메주고개를 오를 때는 멀리서부터 힘을 받 아서 오르다 못 오르면 후진을 반복해서 힘을 받아 오르곤 하는 힘이 약한 열차 였다. 수려선은 60년대가 가장 호황시기였다. 이용하는 승객들도 늘어나 딱딱한 나무 의자를 갖춘 객차 2량~3량까지 달고 다닐 정도로 승객들은 많이 늘어났지만 철 도 운영에는 별 도움이 못되어 적자 운행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열차를 이용하 는 승객들은 거의가 장사꾼들이었다. 차내는 항시 땀내와 푸성귀 냄새가 어우러 진 시큼한 냄새 속에 만나는 그들은 언제나 생기가 넘쳤다.

다정다감하게 주고받는 인사와 인정이 넘치는 친절미로 객차 안은 언제나 구수 한 잡담의 얘기가 이어졌다. 결행과 연착이 잦은 열차지만 승객과 승무원은 언 제나 만나면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늘 다정다감했다. 짜증나도록 기다리다 승 무원을 만나면 반가운 듯이 열차가 자다가 왔나 하고 농적인 인사를 하면 하도 힘이 들어 조금 쉬었다 왔지, 하고 되받아주는 승무원들의 인사는 연착으로 짜 증스러웠지만 정감이 넘치는 인사로 곧 화기애애(和氣藹藹)진다. 승무원은 승객들의 행선지와 열차를 이용하는 것까지 잘 알고 있으며, 언제나 서로 애교적인 인사가 주고받는다. 객차 안에 마련한 나무 의자가 못이 솟구치 고 송판지는 깨지고 금이 가 앉으면 옷 찢어지기가 일수였지만 장사꾼들에게는 귀중한 열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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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연기를 내뿜으며 기적소리 요란하게 울리고 칙칙폭폭 하고 달리던 수려선 열차!! 열차의 기적소리와 함께 사라진지 40여 년이 된 역전 부지(홍문리 74번 지 일원)에는 50여 호의 주택지가 자리하고 철로는 도로가 되어 흔적마저 사라 지고 없어졌지만 여주에도 기차가 다녔다는 풍문만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