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민과 애환을 함께 했던 수여선 협궤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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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길 옆 오막살이
기차길 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잔다
칙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차소리 요란해도 아기아기 잘도 잔다
기차길 옆 옥수수밭 옥수수는 잘도 큰다
칙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차소리 요란해도 옥수수는 잘도 큰다

1947년 윤석중이 가사를 쓰고 윤극영이 가락을 입힌 ‘기차길옆’이라는 동요이 다. 필자가 어렸을 때도 자주 불렀던 노래다. 동요이긴 하지만 가사를 가만히 뜯 어보면 일제강점기 후 해방을 맞은 우리네 현실과 미래를 낙관적으로 표현한 것 같기도 하다. 그 당시 기차가 우리 생활과 매우 가깝고 친숙한 존재였다는 점도 알 수 있다.

철도 건설 - 근대화와 식민지 수탈의 이면

기차는 우리에게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1897년 3월 미국의 지원을 받아 기공하 여 1899년 9월 개통된 경인선(인천-노량진, 33㎞)이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였 다. 1901년에는 경부철도주식회사가 설립하고 경부선(서울-부산, 580㎞) 철도 를 착공하여 1905년 1월 1일 전구간이 개통하였다(개통식은 5월). 일본은 영국 처럼 차량이 좌측으로 다녔기 때문에 경부선의 열차도 좌측통행을 하게 되었다. 같은 해에 경의선(서울-신의주, 716㎞)이 완공되었고 1908년에는 경부선과 경 의선이 직통 연결되었다. 공사기간은 경부선이 약 3년 6개월, 경의선이 약 2년 정도로 매우 신속하게 건설되었다.

청일전쟁 이후 또 다른 전쟁을 염두에 둔 군사적 목적이 우선하다 보니 지형을 그대로 두고 공사하기 쉬운 곳을 선정하였고, 이 때문에 곡선구간이 상대적으로 많을 수밖에 없었다. 경부고속도로의 개통 당시 길이가 428㎞인 것을 보면 경부 선의 곡선화가 더 두드러진다.

일제의 강제병합 이후에는 일본과 만주를 잇는 경부선과 경의선의 중요성이 더 욱 커졌다. 남만주철도의 노선과 직통운행도 이루어져 한반도와 중국대륙을 잇 는 국제열차가 운행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철도는 러일전쟁, 제1차세계 대전, 만주국 설립, 중일전쟁, 제2차세계대전 등 전쟁과의 관계에서 보았을 때 대륙과 깊은 연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철도 건립기간이 매우 짧았고 거의 단선이었다. 1930년대에 와서야 경부선과 경의선의 일부분이 복선화되었 다. 경부선과 경의선은 한반도를 종단하는 철도로 대륙 진출의 수단으로 이용 되었으며, 호남선(대전-목포, 286㎞)과 경원선(서울-원산, 226km)은 한반도 지배수단으로, 만포선(평안도 순천-만포, 344㎞)과 혜산선(함경도 길주-혜산, 142㎞)은 산림자원과 광산자원의 채굴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1920년대 이후 우리나라 철도는 대륙의 원료와 식량공급지로의 역할이 커졌다. 이후 중일전쟁 등으로 철도가 군사물자 수송에 많이 이용되었다. 초기의 농산물 위주의 수송이 1930년 이후에는 광공업 위주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 한국 철도는 사회관계 변화, 공업발전과 조응하면서 자본주의 이행 의 기초가 되었다는 일부 의견도 있지만, 철도가 일제의 경제적·군사적 수탈 을 위한 수단이었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철도 그 자체는 우리나라 의 새로운 운송수단으로서 근대화를 촉진시키고, 경제·사회·문화 발전에 많 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중요한 간선철도 이외에도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는 많은 철도가 부설되었다. 일제는 간선철도 건설에 총력을 기울였으나 이를 뒷받침할 준간선 노 선에 대한 건설까지 도맡을 여력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에는 조선인 이든 일본인이든 토착 민간자본이 형성되지 못하였고, 그나마도 조선회사령 등 의 행정적 규제로 인해 자유로운 기업경영이 제한되어 있었다. 이에 총독부는 일본 본국의 철도자본을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1912년 조선경편철도령을 발표 하였는데, 경편철도는 노선이나 차량 규격을 간편화한 것을 말한다. 1914년부터 는 총독부가 원하는 곳에 철도를 부설하면 철도회사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개통 후에도 이익을 내지 못할 경우에는 일부를 보상해 주기도 하였다. 사설철도의 주요 노선들은 국유 철도 간선으로부터 분기하여, 도 단위의 지역에 뼈대가 되는 소위 준간선 철도가 주를 이루었다. 또 당시 주요 물류경로였던 하 항 및 포구와 연결하는 노선, 광산을 연결하는 노선도 있었다. 이들 노선들은 일 제의 식민지 지배라는 시각으로 계획되었으며, 지역주민이나 특정산업의 이익 을 고려한 것은 아니었다. 초기의 사설철도는 빨리 건설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 에 경편철도로 부설되었지만, 규격의 차이 때문에 국영철도와 직통이 불가능하 다는 단점이 있었다. 특히 옮겨 실어야 할 화물열차의 경우에는 큰 문제가 되었 다. 그래서 1920년 조선경편철도령을 조선사설철도령으로 개편하고 향후 사설 철도의 규격을 국영철도와 동일한 규격으로 정하였다. 1920년대 전반은 1차세 계대전 이후의 호황으로 일본 자본가들이 조선의 인프라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 선 시기였다.

1920년대 후반 조선총독부는 ‘조선철도 12년 계획’을 수립하고 조선의 산업화를 명분으로 사설철도의 국유화를 추진하였다. 사설철도의 주요 노선들이 국유화 되었고 협궤노선의 경우 표준궤로의 확장공사도 시행되었다. 그러나 1931년 만 주사변과 만주국 성립은 조선이 대륙침략의 교두보로서의 성격을 공고히 하게 되면서 다시 사설철도가 대량으로 건설되었다. 현 북한지역을 중심으로 광공업 이 성행하게 되었고, 공장건설과 공산품 수송용으로 자체적으로 사설철도를 건 설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 사설철도는 준간선이나 지역개발을 위해 철도의 미개통구간을 계속 건설하는 것이었고, 특정 산업개발이나 자원수송을 위한 용도로도 건설되었다. 후자가 북한지역에 해당하는 경우라면 전자는 남한지역에 집중되었다. 조선경 동철도주식회사가 건설한 수여선(수원-여주)과 수인선(수원-인천)이 전자의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남한강 수운을 대체한 수여선 철도

앞에서 보았듯이 수여선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 조선경동철도주식회사가 부설 하였다. 경동(京東)이라는 이름대로 경기도 동남부 지방을 동서로 횡단하였다. 수여선이 지나가는 지역은 수원, 용인, 이천, 여주이다. 일제가 이곳에 철도를 놓은 까닭은 무엇일까? 다름 아니라 지역의 풍부한 농산자원과 임산자원을 개 발하기 위해서였다. 경부선과의 연결도 고려되었다.

예로부터 남한강 유역인 여주·이천의 가장 중요한 산물은 쌀이었다. 이곳의 ‘자채쌀’은 수운이 발달했던 조선시대에 남한강 수운을 통해 임금에게 진상되었 다고 전할 정도로 윤기와 맛이 뛰어났다. 여주시 중앙부를 관통하는 남한강은 길이가 약 390㎞로 영서 산지에서 발원하여 충북 동부와 경기 동부지방을 흐르 는 한강 중·상류의 큰 물줄기이다. 남한강 수로는 근대 교통수단인 철도나 도 로가 들어오기 전까지 중부 지방의 대동맥 구실을 하였는데 영남지방-중부내륙 과 한양을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교통로였다. 고려와 조선시대 1,000년간 남한강은 전국 제일의 조운로(漕運路)로서 세곡선(稅穀船)과 상선(商船)이 분주하게 오갔다. 세금으로 거둔 조세미(租稅米)는 중간 집하장인 조창이라는 창고에 집결했다. 남한강에는 충주 가흥창(可興倉)과 원주 흥원창(興原倉)이 설치되었다. 가흥창은 조선 전기에는 충청도 동북부의 13개 고을과 경상도 세곡까지 수납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흥원창은 영서지방의 세곡 을 운송하였다. 조창에 집결한 세곡들은 한강의 수로를 따라 서울 용산의 경창( 京倉)으로 옮겨졌다.

조선 말기에 이르면 관선(官船) 조운이 쇠퇴하고 사선(私船)업자에 의한 임운(賃 運;운임을 받고 운반하던 제도)이 널리 행하게 된다. 조선조 학자인 김종직(金宗直)은 여흥(오늘의 여주)에 정박하며 이곳의 아름다 움을 시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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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흥에 정박하다[泊驪興]

신륵사 안에서 그림을 구경하고
청심루 아래에 타던 배를 매 두었네
바람은 순하고 이슬 내린 깊은 밤에
방주에서 사랑노래 한 곡을 부르누나

아지랑이는 먼 언덕 가까운 언덕 틈으로 사라지고
굽이굽이 물굽이를 노를 저어 지나는데
닻줄에 춤추는 건 다정한 백조이고
선봉(船蓬)을 밀치니 무수한 청산이로다
(「한시로 읽는 경기」, 2011, 115~116쪽)

수로교통의 발달로 인해 상업적인 취락이 형성되었고, 사상(私商)과 조운업자( 漕運業者)가 성장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서도 남한강 수운은 교통과 수송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육상교통 역시 나루터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수여선 이 부설되고 나서는 이 체제에 큰 변화가 생겼다.

여주 지방의 미곡, 강원·충청 지방의 농산물과 임산물들을 여주에 집적하여 수 여선을 통해 수원으로 수송하게 된다. 남한강 수운은 일제강점기 이후 철도와 도로가 건설됨으로써 쇠퇴하기 시작하여 팔당댐이 완공되던 1974년에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여선은 왜 협궤로 만들어졌나

협궤(挾軌)는 표준궤보다 폭이 좁은 궤간을 가진 철도 선로이다. 현재 우리나라 철도는 모두 표준궤라 불리는 1,435㎜ 궤간을 가진 철로를 사용하고 있다. 폭이 좁은 철로인 협궤는 부설이 쉽고 비용이 저렴하여 교통량이 적거나 제국주의 시 대 식민지 지역의 철도부설에 많이 이용되었다. 협궤는 곡선주로를 더 급하게 할 수 있고, 노반 축조에 적은 비용이 소요되어 부설기간도 대폭 줄일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대신 고속화가 어렵고 안정성이 떨어지며 열차의 대형화도 불가 능하다는 단점이 있다.

협궤도 규격이 여러 가지다. 표준궤보다 조금 더 좁은 1,372㎜부터 시작하여 1,067㎜, 1,000㎜, 891㎜, 762㎜, 610㎜ 등이 있다. 이들 중 우리와 관련이 있 는 궤간은 1,067㎜, 762㎜, 610㎜이다. 610㎜ 궤간은 산림철도와 같은 특수한 노선에 쓰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부산궤도(부산진-동래온천)에서 사용하였던 것이 유일무이하다. 1,067㎜는 1899년 서울시에 설치되었던 전차(경전)가 최초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궤간은 시가(市街) 전차 등 ‘궤도(軌道)’에 대해서만 적용되었다. 궤도는 교 통 부문에서 궤도법의 적용을 받는 철도선이나 노면전차선을 의미한다. 1,067 ㎜ 궤간은 이후 평양전차, 부산전차(남전), 함평궤도, 경성궤도(서울궤도) 등지 에 적용되었다가 1960년대 서울시가전차의 폐지를 끝으로 남한에서는 모두 없 어졌다. 이 궤간은 일본,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국가 표준 궤간으 로 사용 중이다. 일본에 가면 대부분의 철도가 이 궤간으로 설치된 것을 볼 수 있다. 표준궤에 비해 육안으로 보기에도 상당히 좁은 것이 확인된다. 일본은 19세기 철도가 첫 부설될 때부터 1,067㎜ 궤간을 사용하였다. 당시 일본 에 와있던 외국인들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하는데 유럽의 국가들이 채택하고 있는 표준궤보다 최고 속도나 수송력에서 훨씬 뒤떨어졌다. 그래서 철도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표준궤로 고치려는 운동이 일어났으나 ‘지형이 복잡한 일본에는 협궤가 표준궤보다 바람직하다’는 주장과 함께 예산 문제 등으로 실행 되지 못하였다. 이 변경 논쟁은 지속적으로 진행되었으나 많은 철도가 만들어진 후라 되돌리기 어려웠다. 일본에 표준궤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64년 도카이도 신칸센이 최초였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표준궤간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1896년 고종 임금은 ‘조선 의 모든 철도는 원활한 물자수송을 위하여 철도궤간을 4尺 8寸(1,435㎜)으로 한 다’는 광무 칙령31호 ‘국내철도건설규칙’을 공포하였다. 당시 중국에서 건설되고 있던 간선철도가 모두 표준궤이고, 경인선 부설권을 따낸 미국이 표준궤를 채택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표준궤를 채택해야 한다는 의도였을 것이다. 후에 일제가 경부선을 부설할 때 자본이 부족하고 여객·화물이 빈약하다는 것 을 이유로 협궤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일본군 참모본부도 경비와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이유로 협궤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경부철도주식회사 의 시부사와 에이치(澁澤榮一) 사장 등은 이미 부설된 경인철도와 추후 점령할 만주지방 철도와의 연결을 위해서는 표준궤간으로 해야 된다고 강력히 주장하 여 관철시켰다. 결국 일본은 자국내 노선은 협궤로 하였으나 식민지 침탈에 따 른 경제·군사적 목적에 의해 조선의 철도는 표준궤로 만들었던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방향을 다시 돌려 우리나라 협궤에 대해 계속 살펴보자. 궤간이 762㎜인 협궤는 우리나라에 경편철도, 산림철도 등의 용도로 부설된 것이 최초이다. 주로 사설 철도 회사가 부설하였다. 수인선·수여선을 비롯하여 부산진-동래온천 간, 이 리-전주 간, 대구-학산 간 노선 등이 대표적이다. 이중 수인선과 수여선을 제외한 나머지 노선들은 국영화 후 표준궤나, 1,067㎜로 전환되었다. 남한에서는 1995년 수인선을 끝으로 모두 폐선되었으나 북한은 전기철도화하여 여전히 사 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수여선에 협궤를 적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수여선은 기본적으로 남한 강 수운을 대체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철도의 여러 부설 목적 중에 광산에서 채 굴한 광석을 운반한다든지 현지 산물을 운송하는 등의 단순한 용도로 사용한다 면 굳이 건설비용이 많이 드는 표준궤를 선택할 이유가 없다. 더구나 협궤는 유 지비용, 철거비용까지 적게 든다. 산물 수송이 촌각을 다투는 것이 아니라면 협 궤가 더 경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곡선을 줄이고 급구배(경사)를 지양하는 오늘날에는 건설비가 표준궤와 거의 다를 바 없고 토지비용 절감도 크지 않기 때문에 협궤 채택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수여선을 달렸던 기관차들

수여선에 운행하기 위해 도입한 최초의 기관차는 ‘혀기형’증기 기관차였다. 혀기 는 협궤의 일본어 발음에서 유래했다. 수여선은 1930년 12월 1일 수원-이천 간 53.1㎞가 개통되고, 다음해 12월 1일 이천-여주 간 20.3㎞가 마저 개통되어 총 연장 73.4㎞의 전 구간이 운행되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일본 기샤[汽車] 회사제 협궤기관차가 운행되다가 이후 1940년대에는 일본 히다치[日立]제 혀기11 탱크(tank)형 증기기관차가 도입되어 수원운전사무 소에서 조립, 수인선과 수여선에 운용되었다. 히다치는 1974년 8월 개통한 수도 권 전철 1호선을 이용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을 회사이다. 객차 안에 히다치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부착되어 있던 기억이 생생하다. 증기기관차는 기술의 발달로 인해 일찌감치 철도에서 퇴역하였지만 건널목 도 로표지판을 비롯하여 장난감, 학용품(연필깎기) 등에 계속 사용하고 있어 우리 에게 매우 친숙하다. 증기기관차는 열을 통해 물을 끓이고 증기를 발생시켜, 이 증기의 압력으로 바퀴를 굴린다. 우리나라 증기기관차의 이름을 보면 숫자가 맨 앞에 표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는 전륜-동륜-후륜을 뜻하며 숫자는 바퀴의 수를 표시한다. 전 륜은 차량이 레일에 잘 접할 수 있도록 하고, 동륜은 동력을 받아 차를 움직이 게 하며, 후륜은 차량의 탈선을 막고 하중을 부담하는 역할을 한다. 예를들어 2-8-2 혀기2-13’이라고 하면 전륜 바퀴수 2개, 동륜 바퀴수 8개, 후륜 바퀴수 2개인 혀기형 기관차의 두 번째 도입된 차종이며, 해당 차종의 13번째로 도입된 차량이라는 뜻이다.

또 증기기관차는 크게 텐더형, 탱크형으로 구분한다. 텐더형은 물과 석탄을 바 로 뒤에 붙인 별도의 탄수차(tender)에 적재하는 차량을 말하고, 탱크형은 기관 차 본체에 모두 적재하는 형식을 말한다. 텐더형은 본체와 탄수차를 크게 제작 할 수 있는 만큼 힘이 세고 멀리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탄수차 때문에 길이가 길어져 운용이 어렵고, 역방향 운행 시 시야에 제한이 크다. 따라서 종착 역에서 방향을 바꾸기 위해서는 전차대(轉車臺, turntable)의 설치가 필요하다.

1954년 1월 경기도 오산 건널목에서 발생한 수색발 천안행 통근열차와 군용트 럭의 충돌 참사는 당시 종착점이었던 천안역에 전차대 시설이 없어 기관차는 탄 수차를 앞으로 향한 채 역방향으로 운행하여 시야가 확보되지 못했던 점이 중요 원인 중 하나였다. 지난 2015년 9월 20일 수여선 수원 구간 답사 때 도움을 준 안세흥 선생(수여선 운행 당시 수원역 근무)은 필자에게 수원역에도 기관차를 돌리기 위한 전차대가 있었다고 알려줬는데 정확한 사실은 확인하지 못했다.

탱크형은 기관차 본체에 석탄과 물을 적재하기 때문에, 크기에 제한이 있을 수 밖에 없어 장거리 운행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대신 후방 시야가 상대적으로 좋 아 역방향 운행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우리나라에는 텐더형과 탱크형 모두 활 동하였으나, 남아있는 탱크형은 서울과학관의 혀기8-28 협궤 증기기관차가 유 일하다고 한다. 혀기 증기기관차는 1965년 협궤 동차가 개통되면서 같이 운행 하다가 점차 운행 빈도가 낮아졌다. 결국 1978년에 견인력과 속도가 현저히 떨어져 운행의 타당성이 동차에 비해 낮기 때문에 완전히 폐지되어 수인선에서도 사라졌다. 혀기1형(차호불명)은 서 울 어린이대공원에, 혀기7형(차호불명)은 소래역사관 앞에 전시되어 있다. 혀기 8형(차호불명)은 1978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전남 흑산도에 어린이날 선물 로 기증되었으나 바닷바람에 부식되어 흉물이 되자 철도차량 제작사인 한진중 공업에 매각되었다. 혀기11-12호는 삼성화재교통박물관, 11-13호는 철도박물 관, 11-14호는 강원도 용평리조트에 전시되어 있다.

수여선은 1972년 폐선될 때까지 증기기관차만 다녔던 것은 아니다. 1965년 인 천공작창에서 액압(液壓)식 디젤동차(動車)가 조립되어 수여·수인선에 운행 되었다. 1978년 혀기형 증기 기관차가 폐지된 후 수인선에 계속 사용하였으나 1995년 수인선 폐선과 함께 은퇴하였다. 액압식 디젤동차는 토크컨버터라는 자 동변속기 체계가 도입되면서 들여온 방식이다. 디젤엔진이 발전기를 돌려서 전 기를 생산한 다음 전기가 모터를 돌리고 그 모터가 바퀴를 굴리는 디젤 전기식 동차도 있었다. 초기의 전기식은 엔진에 커다란 발전기와 모터까지 붙여야 했기 때문에 출력이 제한되었고 중량도 무거워지는 단점이 있어 액압식이 많이 사용 되었다. 수여선과 수인선에는 협궤 디젤액압동차만 운행하였다. 동차 163호가 철도박물관 부곡관에 전시되어있다. 9165호는 경기도 고양시에 있었으나 현재 는 고철로 분해된 상태라고 한다.

수여선은 시기별로 어떤 기능을 수행하였나

① 1930~40년대
수여선이 개통되기 전 철도 연선(沿線) 지역의 여객은 육상교통(도보, 버스) 중 심으로, 화물은 남한강 수운을 중심으로 한 지류와 육상교통(지선)으로 이루어 졌다. 수여선은 여주와 원주 일대의 풍부한 농림자원들을 경부선 철도와 연결하 여 수송하고자 부설되었다. 수여선 건설주체인 경동철도는 1935년 여주와 원주 (흥호리)를 연결하는 16㎞의 철도부설권을 추가로 획득하였다. 경동철도는 기차 노선 외에도 여주에서 원주까지 신작로를 따라 화물자동차 노선을 개설하였고, 원주에 트럭터미널을 설치하였다. 회사는 여객수송도 직영 또는 계열화하여 이 일대 교통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남한강 유역은 수여선뿐만 아니라 장호원을 접 점으로 하는 경기선(안성선)과 충주를 접점으로 하는 충북선 등이 경부선 및 항 구를 연결하는 노선으로 건설되어 물자의 흐름이 분산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수여선의 수송체계를 보다 더 완결시킨 것이 수인선이다. 경동철도는 수여선을 경부선에 연결한다는 것이 당초 목적이었으나 식민지 통치라는 상황 하에서 물 자를 일본으로 수송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따라서 수 원-인천 간의 철도연결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경동철도는 수인선 개통 3개월 후인 1937년 11월 인천과 오사카를 운행하는 아마가사키(尼崎) 기선과 화물운수 를 제휴하는 등 곡물의 일본 수송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수여선은 용인·이천·여주, 그리고 강원 영서남부를 세력권으로 전통적인 교 통수단을 대체하는 지역 간선교통수단으로 기능하였다. 또 수인선을 매개로 하여 항구와 최단거리로 연결함으로써 식민지 경제수탈 노선으로서의 기능을 동 시에 갖게 되었다.

② 1940~50년대
앞선 시기의 중부내륙이나 영서지방의 교통망은 경부선 철도와 항구 등지를 최 단거리로 연결하는 지역간선철도의 형태였다. 여주-수원-인천 노선, 장호원- 천안-장항 노선, 충주-조치원 노선 등이 이 같은 맥락으로 운행되었다. 이들은 오지지방과 간선철도 및 항구 연결이라는 기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더 깊숙한 오지까지 노선을 연장코자 하였다. 그러나 중앙선 철도의 개통은 이러한 구조를 본질적으로 변화시켰다. 중앙선은 서울(청량리)에서 경주를 연결하는 철도로서 경부선에 이은 제2의 종 관철도이다. 총연장 387㎞, 1936년 착공하여 1942년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개 통 시에는 경성과 경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경경선(京慶線)이라 불렀다. 당시 일 본은 전시체제를 구축하고 철도를 통해 물자를 대륙으로 수송하는 기능을 강화 하고 있었다. 중앙선은 종관철도로서의 수송력 강화와 경부선의 우회노선 기능 이라는 시급성 때문에 악조건 속에서도 6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완성되었다. 이 중앙선은 본의 아니게 수여선 연선지역의 교통상황을 변화시켰다. 중앙선이 통 과하는 원주가 지역 교통의 중심지역이 되어 강원 영서지방의 여객과 물자를 실 어 나르게 된 것이다. 결국 영서지방의 물자를 나룻배, 자동차, 수여선 철도 등 을 활용하여 수송했던 경동철도회사는 큰 타격을 입고 1942년 충북선을 경영하 던 조선철도주식회사에 합병되고 말았다. 결국 이 시기는 수여선이 가졌던 오지와 항구 및 간선철도와의 연결이라는 주요 기능이 중앙선 간선철도의 등장으로 대부분 상쇄되고, 경기도의 ‘지역철도’로 변 모하게 되었다.

③ 1950~폐선(1972)
중앙선의 등장으로 물자 수송이라는 핵심 기능이 대폭 축소되었지만, 수여선의 여객 수송 기능은 해방 이후까지 지속되었다. 경기도 남부지방에 버스 교통이 본격화된 것은 1960년대에 들어서였다. 그 전에도 버스는 있었지만 철도를 이 용하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3번 국도를 따라 서울-광주-이천-장호원 노선을 중심으로 버스 운행이 활발했으나, 수여선이 통과하는 구간은 상대적으로 버스 노선 개발이 더뎠다. 수여선이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서울 가는 길로 이용되기도 했지만, 전쟁 이후부터는 여주와 이천주민들의 버스 이용 빈도가 압도적으로 늘 어났다. 이천 인근에서 서울 가는 사람은 3번 국도를 이용하고, 수원 가는 사람 은 수여선을 이용하였다. 수여선 기차는 하루 4회 정도 운행하였음에도 사람들 은 버스보다 철도를 선호하였다. 그 이유는 도로가 아직 비포장 상태여서 속도 내기가 어려웠고, 비포장 가산금 등으로 버스 운임이 기차보다 2배 이상 비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버스 교통 여건이 빠르게 개선되면서 오래가지 못했다. 1965년 경남(京南)여객운수 회사가 완행이 아닌 직행버스를 수원-여주 노선에 투입하였고, 도로 포장이 늘어나면서 버스의 수송 비중이 높아지게 된다. 수여 선은 여객수도 감소되었지만 1966년을 정점으로 물자수송이 화물버스에 밀리면 서 입지가 크게 위축되었다. 1970년에는 연간 적자가 1억 8천만 원에 달하였고 결국 1972년 3월 31일자로 폐선되고 말았다. 그러나 폐선 이후 버스가 수여선을 이용하던 승객 수요를 충당하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불편을 겪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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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여선은 어떤 사람들이 이용했나

앞에서 보았듯이 수여선의 가장 큰 건설 목적은 물자수송이었으나 인근 주민들의 이동 수단으로도 활용되었다. 철도회사가 기대했던 것은 수원에서 경부선으 로 환승하여 서울로 가는 이용객이었겠으나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수여선 노선 범위 안에서 이동하는 승객들이 대다수였다. 화물수송과는 달리 여 객수송에서는 처음부터 지역노선의 성격이 매우 강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천·여주에서 서울로 가는 사람들은 광주를 경유하는 3번 국도를 많이 이용하 였다. 사실 수여선 기차의 속도는 지금의 열차와 비교하면 거북이 수준이었다.

수여선은 증기기관차와 디젤액압동차가 운행되었는데, 제원 상 최고시속 70㎞ 까지 낼 수 있었다고 하지만 노선 상황에 비추어 보면 훨씬 천천히 운행되었을 것이다. 1930년 신문기사(동아일보, 1930년 10월 4일자)에 ‘수원-이천 간 30마 일’(약 50㎞)를 1시간 20분 정도에 갈 수 있을 것으로 나와 있으나 실제 수원역 에서 여주역까지 73㎞ 구간의 소요시간은 4시간 이상이었다고 한다.(공식적인 운행 시간은 2시간 23분) 수원 세류동 지역민의 증언에 따르면 여주 방면에서 승차한 승객은 거의 대부분 수원에 서 하차하였는데, 제일 붐볐던 역은 경부선과 만나는 수원역이 아니라 수원 중 심가에 위치한 화성역(일제강점기에는 본수원역)이었다. 이용목적은 크게 두 가 지였는데 하나는 장보러 가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학교 오가는 것이었다고 한 다. 수여선 노선 부근에는 수원 영동시장을 비롯하여 용인 김량장, 오천장, 이 천장, 여주 읍내장 등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유동인구가 발생하였다. 특히 수원 이 경기남부의 중심지역으로 성장하게 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이밖에 놀러가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 여주에 있는 영릉(세종대왕릉)과 신 륵사가 행락객들이 선호하는 코스였다고 한다. 이상을 종합해 보았을 때 해방과 6·25 전쟁 이후 1970년대까지 수여선을 매개로 하는 경기남부지역 생활권이 형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여선 노선의 흔적들

① 수원역 - 화성역 구간(3㎞)
지금의 수원역 광장에서 남동쪽으로 400m 정도 이동하면 콘크리트 자재의 대 형 급수탑과 벽돌 자재의 소형 급수탑을 볼 수 있다. 급수탑은 증기기관차에 물 을 공급하던 시설이다. 우리나라 초기 철도시설의 보존과 문화재 등록은 급수탑 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급수탑은 주로 원통형 평면을 지니고 있으며 상부와 하부로 나누어진다. 하부에는 석탄 등을 이용하여 물을 끓이기 위한 엔진과 상 부의 물탱크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펌프가 설치되어 있다. 급수탑 주변에는 물 을 쉽게 공급받기 위하여 연못이나 물을 저장해 놓을 수 있는 저수조가 있다. 수원역은 수여선과 수인선이 교차하던 곳으로서 두단식(頭端式) 승강장을 가지 고 있었다. 두단식 승강장이란 한쪽 끝이 막혀 있는 승강장을 말한다. 운전대 바 로 앞쪽에서 선로가 끊어져 있으며, 모든 플랫폼은 하나의 평면으로 연결되어 있다. 한쪽 끝이 막혀 있기 때문에 거의 종점역에서만 사용하는 방식이며, 이 때 문에 터미널식 승강장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입출차에 어려움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삼각선을 활용하였는데, 때에 따라서는 기 관차의 앞뒤를 바꾸는 데도 활용되었다. 수원역을 출발한 수여선 기차는 곧 북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매교동을 지나 구천 동 공구시장 앞 수원천을 비스듬히 건너 화성역(본수원역)에 도착한다. 화성역 은 처음에는 본수원역으로 영업을 개시했다가 해방 이후 1948년 수원화성 옆에 있다하여 화성역으로 개칭하였다. 현재의 2001아울렛 수원점 뒤편에 위치해 있 었다. 이 구간은 철도의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지만 옛 노선이 도로로 바뀐 채 남아있다.

② 화성역 - 원천역 구간(3.5㎞)
화성역은 수여선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리던 역이었다. 수원 영동시장 과 지동시장을 이용하러 온 사람들, 수원으로 통학하는 학생들로 붐볐다고 한 다. 지금도 그곳 버스정류장 이름이 화성역일 정도로 당시에는 번화가였다. 화 성역을 출발한 기차는 지금의 세지로 길을 따라 동쪽으로 달렸다. 성빈센트병원 근처의 고갯길은 경사도가 조금 있는 이른바 난코스이다. 가끔은 기차가 힘이 달려 올라가지 못할 때는 승객들이 너도나도 내려서 기차를 밀었다고 한다. 지 금은 상상할 수 없는 그때 그 시절 얘기다. 물론 협궤열차라 가능했겠지만. 동수원사거리를 지난 기차는 중부대로길을 면해서 동쪽으로 달린다. 지금의 캐 슬호텔 뒤쪽을 통해 아주대 삼거리를 지나 원천역에 이르게 된다. 동수원사거리 부터는 노선이 택지로 편입되거나 다른 도로가 생기면서 완전히 교란되어 전혀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원천역은 지금의 원천동 주민센터 자리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③ 원천역 - 덕곡역 구간(2.5㎞)
원천역에서 출발한 기차는 원천교 삼거리 인근에서 90도 가까이 꺾어 북동쪽으 로 진로를 바꾼다. 덕곡역은 현재의 용인시 기흥구 영덕동에 위치했던 역으로 1932년 5월 영업을 시작하였다. 흥덕 택지지구 일대 한국아델리움아파트 근처 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구간은 원천유원지가 있었으며, 1990년 즈음까 지 수여선의 노반이 그대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수원의 대표적인 시민 휴양지였 던 원천유원지는 1977년 관광지로 조성된 이후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시원한 유원지 일주도로와 15만 평의 저수지를 중심으로 각종 놀이시설, 낚시터, 야외 수영장, 숙박시설, 카페 등이 운영되었다. 지금은 저수지가 호수공원으로 바뀌 고 근처에는 아파트 대단지가 들어서거나 공사 중에 있다.

④ 덕곡역 - 신갈역 구간(3.5㎞)
덕곡역을 출발한 기차는 수여선 구간에 있던 2개의 터널 중 하나인 덕굴을 지나 게 된다. 덕굴은 현재는 매몰되어 사라졌으며, 그 일대에 용인 흥덕지구가 들어 서 있다. 덕굴(태광CC 아래)을 지나 신정로길을 타고 지금의 경부고속도로와 교 차(굴다리)한 후 신갈역에 도착하게 된다. 신갈역은 현재의 용인시 기흥구 구갈 동에 있는 한성 2차 아파트 진입로 전후에 있었다고 한다.

⑤ 신갈역 - 어정역 구간(3.4㎞)
신갈역 인근에는 분당선과 용인경전철이 만나는 기흥역이 있다. 기흥역에서부 터 운동장·송담대역까지의 경전철 노선은 과거 수여선의 신갈-용인 노선과 거 의 일치한다. 신갈역을 떠난 기차는 지금의 국도 42호선과 면해서 달려간다. 구갈지구로 들어서면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서 있어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이를 뚫고 나가 강남대학교를 끼고 북동쪽으로 돌면 어정역에 이르게 된다. 어정역은 현재의 용인시 기흥구 중동에 위치했으며, 공터와 텃밭으로 방치되어 있다가 최 근 건물들이 들어섰다. 역 부지 바로 옆에는 버려진 창고(농협)도 보인다.

⑥ 어정역 - 삼가역 구간(5.9㎞)
어정역을 출발하자마자 곧 남동쪽으로 방향을 전환하지만 동백지구에 가로막혀 그 흔적이 또다시 끊기게 된다. 동백지구를 관통한 기차는 동백동의 가장자리에 이르러 메주고개를 만난다. 이 고개를 넘어야 용인시내 중심부로 들어갈 수 있 었는데 이 고개에 수여선 두 개의 터널 중 하나인 멱조현 터널이 있었다. 이 구 간에서는 1962년 1월 30일 큰 사고가 났었다. 당시 신문기사(경향신문, 1962. 1.31자)에 의하면 ‘여주에서 수원으로 가던 기동차(汽動車) 제250 열차가 수원기 점 17.1㎞ 지점에서 탈선전복’하였다. 차체에 불까지 나 승객 50여 명 중 3명이 숨지고 42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고는 중간에 기관고장으로 지체된 기차가 시간을 만회하려고 내리막 곡선 구간에서 과속으로 달리다가 탈선 전복한 것으 로 밝혀졌다. 불은 사고 후 객차 안의 난로에서 발화되었다고 한다. 메주고개를 넘어가면 현재의 동백죽전대로를 면해 남동쪽으로 철길이 이어졌 다. 이 구간에는 도랑을 통과하는 작은 철도교량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삼가역 터 는 국도 42호선과 금학천, 용인시청 진입로로 둘러싸여 있다. 어정역-삼가역 구간은 수여선 역간 거리가 가장 먼 구간이기도 하다.

⑦ 삼가역 - 용인역 구간(2.3㎞)
삼가역을 출발한 기차는 용인의 구시가지를 누비며 동쪽으로 달린다. 금학천과 42번 국도 사이로 철로가 지나갔다고 한다. 이 구간은 역간 거리가 2.3㎞에 불 과하다. 아무래도 시가지다보니 거리가 짧았을 것이다. 용인역은 처인구 김량장동 254번지 일대에 위치해 있었다.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으며 GS수퍼마켓 이 들어서 있다. 경기도가 경기옛길 영남길이라는 역사문화탐방 도보길을 만들 었는데(2015년 10월 개통) 용인시청에서 양지면 남곡리에 이르는 구간 명칭을 ‘수여선옛길’이라고 명명하였다.

⑧ 용인역 - 마평역 구간(4.3㎞)
기차는 용인역을 출발하여 금학천을 옆에 두고 달린다. 하천가를 따라 가장 오 래된 5일장 중 하나인 용인장(용인중앙시장)을 만날 수 있다. 수도권 대표 시골 장이라고 불리는 용인장은 고려시대 김량이라는 사람이 맨 처음 장을 열어 ‘김 량장’으로 불리다 1950년대 초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1960년대 이후에는 김량장과 용인읍을 중심으로 도소매 위주의 점포가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종합 시장으로 규모가 확대되었다. 수여선 승객 수를 보면 수원 화성역보다는 적지만 용인역도 이용하는 사람이 꽤 많았다. 금학천은 용인종합운동장에 이르러 경안천을 만나고 경안천은 양지천 지류와 합류한다. 기차는 양지천을 거슬러 42번 국도변 옆으로 계속 달리다가 마평역 에 도착한다. 역은 현재의 용인시 처인구 마평동에 있었으며, 그 자리에는 다세 대 주택이 들어서 있다.

⑨ 마평역 - 양지역 구간(3.5㎞)
마평역을 출발한 기차는 운치 있는 시골길을 달린다. 왼편으로는 야트막한 야산 과 오른쪽으로 전답이 스쳐 지나간다. 양지역은 양지면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었 다. 현재 역터에는 센트럴타워라는 건물과 폐기물 처리장이 들어서 있다. 양지 면은 용인의 북동부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로서 영동고속도로와 국도 42선이 관 통하고 양지 나들목이 위치하고 있으며 국도 17호선의 시발점이다.

⑩ 양지역 - 제일역 구간(3.5㎞)
기차가 양지역을 출발하여 지금은 번화가가 된 양지읍내를 가로질러 나아간다. 42번 국도와 면해서 달리다가 양지IC 진출입로와 열십자로 교차한다. 그 뒤 국 도의 오른편 야산자락을 따라 가다보면 제일역에 도착한다. 노변에 있는 가옥들 이 옛 철길 노반에 텃밭을 일구어 놓은 모습도 보인다. 역은 지금의 처인구 양지 면 제일리에 있었으며 역 건물을 사라지고 공터로 남아있다.

⑪ 제일역 - 오천역 구간(4.6㎞)
제일역에서 기차는 42번 국도와 함께 북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린다. 옆에 복 하천도 같이 달린다. 작은 공장들이 나오나 싶더니 영동고속도로가 위로 지나간 다. 하천을 따라 굽이굽이 지나던 기차는 마장면을 바라보고 남동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서서히 오천역을 향해 진입한다. 역은 현재의 오천2리 마을 회관 앞 도 로 건너편에 있었다. 수여선 노선 중 유일하게 역사가 바로 얼마 전까지 남아 있 었다. 이 역사가 계속 존치되었던 이유는 폐역되고 난 후 민가로 쓰였고, 후에 전기공업사가 들어섰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건물 현관에 ‘안전제일’이라는 말이 쓰여 있다. 그러나 이 근처가 이천마장 택지개발지구로 되어 있어 보존이 불가 능한 상태가 되었다. 토지보상을 완료하고 실소유자가 된 LH공사는 보존계획 은 없다면서 철거를 강행했고, 이 글이 써지고 있던 2015년 11월 30일 사라지고 말았다. 몇몇 언론과 철도 동호인들이 민원을 넣고 기사를 통해 오천역 보존 필 요성을 제기했지만 자본의 논리 앞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수여선의 얼마 남지 않 은 유산 가운데 또 하나가 없어지니 씁쓸하고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⑫ 오천역 - 표교역 구간(5.7㎞)
오천역을 발차한 기차는 마장면사무소 앞과 마장사거리를 거쳐 구 국도인 지 금의 서이천로를 따라 동쪽-북동쪽으로 달리다가 다시 42번 국도와 합쳐진다. 이 길을 따라 가다보면 보통다리사거리 근처의 미니철교를 지나 표교역에 도착 한다.

⑬ 표교역 - 유산역 구간(3.7㎞)
표교역을 떠난 기차는 42번 국도를 따라 왼편에 산을 끼고 커다란 반원을 그리 며 나아간다. 중부고속도로와 교차한 후 남산과 북산 사이를 통과하여 유산역에 다다른다. 역은 이천시 호법면 유산2리, 지금의 달려라주유소 근처의 버스정류 장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⑭ 유산역 - 이천역 구간(3.7㎞)
유산역에서 42번 국도와 잠시 멀어진 기차는 이천시내를 향하여 북쪽으로 달려 간다. 길은 4차로로 넓지만 주변은 집이 별로 없고 전답이 이어져 있다. 율현사 거리를 통과하여 이천시내로 접어든다. 철로는 이천 중심도로인 이설대천로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평행하게 달려 시내를 남북방향으로 관통하였다. 이천역은 중심가인 분수대오거리 근처에 있었으며, 지금은 농협과 하나로마트가 들어서 있다. 이곳에는 2011년 주민자치위원회가 세운 이천역 비석이 놓여있는데 수여 선과 이천역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새겨져 있다. 경기도가 현재 추진하는 성남시 판교역과 여주역-문경역을 연결하는 중부내륙 선 철도가 완공되면 새로운 이천역이 들어서게 된다. 수여선 이천역에서 남서쪽 으로 약 2㎞ 정도 떨어진 곳에 건설될 예정이다.

⑮ 이천역 - 무촌역 구간(4.5㎞)
시내 한복판에 있는 이천역을 출발한 기차는 북동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서서히 시가지에서 벗어난다. 노선의 원형이 보였다 없어졌다 반복되기는 하지만 도로 에 흡수되지 않고 노반이 제법 많이 드러나 있는 구간이다. 무촌역은 42번 국도 인근 이천시 부발읍 무촌리에 위치했던 역으로 현재 337호 지방도가 역 인근을 모두 편입하여 흔적을 찾을 수 없다.

⑯ 무촌역 - 죽당역 구간(2.1㎞)
무촌역을 뒤로 하고 기차는 죽당역을 향해 달린다. 이천종합운동장을 왼편으로 끼고 죽당교를 건너면 이천시 부발읍 죽당리에 위치했던 역에 도착한다. 죽당역 은 폐지되었다가 1966년에 임시승강장 등급으로 영업을 재개하였다. 현재 정확 한 위치를 파악하기 어렵다.

⑰ 죽당역 - 매류역 구간(4.7㎞)
죽당역에서 매류역에 이르는 구간은 수여선 중 도보로 답사하기가 가장 좋은 코 스이다. 옛 기차길이 그대로 도로가 되어 선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주변의 산과 들판도 나지막하고 평탄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주위 풍광을 즐기기 좋다. 죽당역을 출발한 기차는 자연과 어우러지다가 양화천 위를 통과하는 매류철교 를 지난다. 수려선 구간 중 비교적 길었던 철교는 지금 도로교량으로 바뀌었다. 기차는 매류삼거리를 지나 매류역에 도착한다. 역은 여주시 능서면 매류리 역촌 마을에 위치했으며, 현재 그 자리에는 ‘역전슈퍼’가 들어서 있다. 마을회관 옆에 는 ‘아! 옛날이여…60년도 내류역과 마을풍경’이라는 커다란 그림판이 보인다. 60년대 역과 역을 중심으로 분포했던 마을의 풍경을 재미있게 보여주고 있다. 그림판 아래에는 협궤열차 수여선과 수인선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적혀 있고 뒷 면에는 협궤열차가 크게 그려져 있다.

⑱ 매류역 - 광대리역 구간(2.6㎞)
매류역을 출발한 기차는 지금의 능여로를 따라 남동쪽으로 달린다. 기차는 중부 내륙고속도로와 교차한 후 광대사거리에 도착하는데 이 근처에 광대리역이 있었다. 광대리역은 수여선 역 중에서 가장 늦은 1966년 문을 열었다. 임시승강장 으로 6년간 이용하다가 폐선될 때 없어졌다.

⑲ 광대리역 - 연라리역 구간(2.7㎞)
기차는 광대리역을 지나 여주방면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가다가 연라리의 한 마 을에 들어서게 되는데 이 근처에 연라리역이 있었다. 이 역은 신대역 또는 이천 거리역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으며 현재의 연라초등학교 근처에 있었다. 수여선 개통 후 폐지되었다가 1954년 영업재개, 1961년 영업중지, 1964년 영업 재개(무 배치간이역) 등 몇 차례 굴곡을 겪었다.

⑳ 연라리역 - 여주역 구간(3.7㎞)
기차는 이제 종착지를 향하여 달려간다. 연라리역을 출발한 기차는 333호 지방 도와 소양천을 면하고 북쪽으로 진로를 바꿨다. 옆에는 중부내륙선 고가철교 공 사가 한창이다. 여주시내로 들어서기 직전 기차가 건넜던 상리철교는 도로교량 으로 대체되었다. 수여선 열차의 종착지인 여주역은 현재 주택지가 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지금의 시민회관 자리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수원역에서 아침 일찍 기차를 탔던 승객들은 4시간이 넘어 여주역에 도착했다. 여주는 영릉과 신륵사가 관광지로 오래 전부터 각광받았다. 한 곳만 들르면 하 루코스, 두 곳 다 가려면 1박이 필요했다고 한다. 휴일이면 소풍을 나온 사람들 과 데이트를 즐기던 연인들이 붐볐던 여주역. 지금은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졌지 만 인근에 현대식 전철역(중부내륙선, 현재 역명 미확정)이 들어선다고 하니 역 사는 반복되면서 발전한다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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